“인플레이션은 어디까지나 화폐적 현상이다”라는 프리드먼의 말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들어맞지 않는 강령이 되어가고 있었다. 생산성향상 속도가 유동성증가 속도보다 빨라지면서 물가안정 기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꾸준한 생산성향상으로 공산품은 물론 농산품도 생산비가 크게 낮아지며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게다가 생산자와 소비자 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과거 물가불안을 재촉했던 화폐유통속도(velocity of money)가 점점 떨어졌다. 오죽하면,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시달리던 미 연방준비위원회(FRB)는 경기진작을 위해 유동성을 풀어도 인플레이션 목표치 2%에 미달하여 고민하기도 했다. 부동산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도, 수년전에는 “물가가 오르지 않아 금리를 올리지 못한다.”는 한은 총재의 푸념(?)이 보도된 적도 있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크게 완화된 유동성이 2020년대 들어 급속도로 팽창되는데다 원자재 공급망 교란으로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예컨대, IMF는 한국의 국가채무 증가속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에서 가장 빠르다고 지적했다. 2021년 하반기 KDI 경제전망에서도 국가채무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며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확산을 경계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는 외생적 요인이 아니더라도 내생적으로 더 크게 잠재되다가 표면화된 셈이다. 2021년 하반기 이후 한국경제는 자산인플레이션(asset inflation)에서 생활물가 인플레이션으로 전환되며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확산되어 가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7년 이후 5년간 소비자물가지수는 97.6에서 102.5로 5.0% 올랐지만, 같은 기간 전국 부동산가격지수는 37.3%나 올랐다.
재정적자는 실제 인플레이션과 기대심리까지 자극해 화폐가치를 떨어뜨린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미미할 때는 유동성을 조금씩 확대하면 금리도 낮추고 경기진작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돈이 많이 풀렸거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강한 국면에서는 유동성 완화가 경기를 진작시키기보다 물가상승과 금리인상으로 직결되는 역효과를 내기 쉽다. 게다가 포퓰리즘 성향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생산성 향상 없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확산으로 시간이 갈수록 화폐가치가 가속적으로 타락하는 현상이 벌어지기 쉽다. 포풀리즘 국가들 대부분이 화폐가치 타락과 더불어 경쟁력이 하릴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생각해보자.
재정적자 증가속도가 가속화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렵듯이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도 자리 잡기 시작하면 제어하기 어렵다. “경제는 공짜가 없다”고 하듯 ‘작용과 반작용’이 동시에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다. 정부는 재정적자 해소 의지를 확실하게 천명하고 ‘작은 정부 프레임’을 지켜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출구를 활짝 열어놔야 한다. 문제는 한국경제가 마주친 현실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갈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최근 지방선거에서 ‘예산 폭탄’을 터트리겠다고 공언했듯이 눈앞의 인기와 표를 쫓아야하는 정치권이 이미 엎지른 물을 다시 주어 담기가 좀처럼 어렵다. 소위 전문가, 고위인사들이 막연하게 “물가오름세가 심상치 않다”는 중언부언 또한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자극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