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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1926년 12월 3일 밤.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가 돌연 실종됐다. 당시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남편의 외도와 이혼요구 등을 둘러싼 도를 넘은 세간의 관심으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상태였다. 이튿날 그녀의 코트·가방 등 소지품이 있는 차가 호숫가에서 발견됐고, 수십명의 경찰이 열흘간 수색을 벌였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실종 11일째. 요크셔의 한 호텔에 숙박하고 있던 크리스티가 발견됐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열하루 동안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추리형식을 빌렸지만 추리극은 아닌 뮤지컬. ‘김수로프로젝트’ 8탄으로 23일까지 서울 필동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아가사’ 얘기다. 이데일리가 주최하고 아시아브릿지컨텐츠가 제작한 작품은 추리소설 작가 크리스티의 실종 실화를 바탕으로 연극적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 그녀가 사라졌던 11일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실존 인물과 가상의 사건을 연결시켜 미스터리 뮤지컬로 재창작했다. 이야기는 크리스티가 왜 실종됐는지 그녀의 심리를 파헤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무대장치와 소품 등 크리스티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알고 나면 더 재밌는 비밀을 살펴봤다.
△크리스티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들
“소설을 쓰는 건 거대한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크리스티가 계속해서 되뇌는 말이다. 복잡한 미궁은 그녀의 심리상태를 나타낸다. 공연장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건 미궁으로 꾸며진 무대다. 극이 시작되면 관객들은 미궁 속으로 초대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김태형 연출은 “누구나 마음속 미궁 안에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악하고 추한 모습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며 “미궁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영상을 활용한 것은 자기 안의 괴물을 발견한 후에도 과감하게 맞서는 크리스티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다”라고 설명했다.
크리스티가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 신화를 레이몬드에게 들려줄 때 사용한 붉은 실과 단검 등도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다. 김 연출은 “실과 검은, 소설을 쓸 때마다 복잡한 미궁을 설계하고 다시 빠져나와야 하는 창작자로서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라며 “소설가뿐 아니라 모두에게 피하거나 숨기고 싶은 스트레스가 있다. 미궁을 빠져나가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영웅적인 일인지를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감초 역할 뒤에 숨은 묘미
진지한 분위기로 흘러가다가도 관객의 웃음을 끌어내는 인물이 있다. 크리스티의 곁을 맴도는 하이에나 같은 신문기자 폴이다. 그는 크리스티의 사생활과 신작 등에 관심을 가지고 캐내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이번 이야기는 정말 대박이야. 잘 들어봐. 인디언 섬이라는 무인도에 8명의 남녀가 정체 명의 사람에게 초대를 받아. 하지만 섬에 모인 사람들은 차례로 죽어가고,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식탁 위에 있던 인디언 인형이 한 개씩 없어지는 거야. 범인은 그 안에 있어. 제목은 ‘인형의 꿈’. 한걸음 뒤엔 항상 범인이 있었는데…. 어때?” 관객들의 폭소가 터진다.
웃기는 역할을 자처하는 것 같지만 사실 폴이 하는 이야기는 실제 크리스티의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내용이다. 폴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크리스티의 소설을 미리 빼내 다른 작가에게 팔고 있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하고 있다. 폴이 ‘여행을 떠나요’라는 제목으로 전한 이야기는 소설 ‘오리엔탈 특급살인’의 내용을 재밌게 각색한 것이다. 김 연출은 “극 중 폴은 뒤에 펼쳐지는 레이몬드의 과오를 미리 드러내는 역할이자 유머를 통해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캐릭터”라며 “크리스티의 소설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눈치챌 것이다. 하지만 모르더라도 폴의 재치있는 대사를 그대로 즐기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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