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치료제 분야의 글로벌 선두주자인 미국 페어테라퓨틱스가 이달 중순께 매물로 나오면서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 전망을 두고 자본시장에서 종종 나오는 말이다. 안 그래도 밸류에이션(기업가치) 산정이 애매해 글로벌 플레이어들의 실적이 곧 ‘지표’로 통하는 상황에서 선두주자가 고꾸라졌으니 국내 관련 시장 분위기가 여간 무거워진 게 아니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특히 투자 라운드를 돌고 있거나 계획하는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업체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는 모양새다. 그나마 체력이 남아 있는 일부 업체는 자금조달 계획을 소폭 연기하는 한편, 이제 막 라운드를 클로징하려던 일부 업체는 투자사 요청으로 추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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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테라퓨틱스가 매각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은 약 보름 전인 지난 17일이다. 회사 측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매각과 합병, 기술이전 등을 포함한 전략적 대안을 모색 중”이라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구조조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2013년 설립된 페어테라퓨틱스는 2017년 업계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중독 치료용 디지털치료제 ‘리셋’을, 2018년엔 오피오이드 중독 치료용 디지털치료제 ‘리셋-O’, 2020년 불면증 치료용 디지털 치료제 ‘솜리스트’를 허가받은 업체다. 이후 코로나19로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에 대한 기대감이 막대했던 2021년 회사는 스팩 합병을 통해 나스닥에 상장했다. 상장 당시 페어테라퓨틱스가 인정받은 기업가치는 약 2조원 수준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페어테라퓨틱스의 영업손실은 나날이 확대됐다. 보험 적용이 제한적으로 이뤄졌고, 치료제를 처방하는 의사나 이를 사용할 환자들로부터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면서다. 결국 2조 수준의 밸류에이션은 수백억 원대로 뚝 떨어졌고, 페어테라퓨틱스는 이내 매각 카드를 꺼내들었다. 28일(현지시각) 종가 기준 페어테라퓨틱스의 시가총액은 3631만달러(약 468억 원)다.
이를 두고 강성지 웰트 대표는 이데일리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페어테라퓨틱스는 제대로 ‘진화’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기성 의약품은 한 번 허가받아 시장에 출시되면 크게 바꿀 수 있는 게 없지만, 디지털 치료제는 출시 이후부터 사용자 피드백을 반영해 문제되는 부분을 수정하고,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을 보강하며 진화한다”며 “타이밍을 놓치면 오히려 출시 후보다 치료제로서의 효과가 악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경기 침체에 페어 사태까지…쉽지 않은 투자유치
장기간 이어진 경기 침체에 페어테라퓨틱스 사태까지 겹치면서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짙어졌다. 글로벌 플레이어들의 실적 및 밸류에이션이 참고 지표로 활용되는 가운데 선두주자가 고꾸라지며 분위기가 또 한 번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투자 라운드를 돌거나 계획했던 일부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들은 특히나 우려가 더 큰 모양새다.
실제 오는 4월 초 브릿지 투자를 마무리하려던 국내 한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은 일부 투자사의 투자 보류로 클로징 일정을 연기했다. 사안에 정통한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논의가 이어졌던 투자사들 가운데 일부가 시장 분위기를 우려해 (업체에서) 추가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시장 사이즈나 유망성 측면에서는 투자하는 것이 마땅하나, 최근 페어테라퓨틱스 사태의 영향이 얼추 있었을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당시 성장성에 베팅하던 VC들도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국내 VC 한 관계자는 “어느 시장에서나 그렇지만,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에서는 특히 ‘성장성’만으로 가치를 절대 따질 수 없다”며 “사람 건강에 적용되는 분야인 만큼, 상용화 가능성과 효과가 충분해야 하고 보험 수가 문제도 해결하는 등 현실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근에도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들과 미팅을 종종 하는데, 투자 집행까지 간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라며 “기술 개발은 기본이고, 재무적으로 탄탄하면서도 상용화 가능성이 보이는 곳을 찾는 것은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비정상화의 정상화 과정이 이뤄지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은 유망하지만 여러 숙제도 남아 있는 분야”라며 “균형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코로나19 이후로 모두가 급하게 관심을 가지다 보니 (밸류에이션에) 거품이 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트렌드를 민첩하게 좇는 자본의 논리와 달리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는 진득하게 발전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