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미술관서 초대전 연 '제주화백' 김보희
동양철학에 서양적 구상회화 얹은 화풍
50년 화업의 진수 '투워즈' 등 55점 걸어
15m 달하는 초록시선 응축한 대작 압권
| 김보희 화백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금호미술관서 연 ‘투워즈’ 전에 건 자신의 작품 ‘더 데이즈’(2011∼2014) 앞에 섰다. 작품은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기만 하던 자연 속에 들어선 화백의 시선을 응축한 대작이다. 100호(162×130㎝) 규모 27점을 연결해 거대한 한 점(390×1458㎝)으로 완성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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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노을이 그냥 노을로 보이지 않고, 매일 지는 해지만 점점 느껴지는 게 많아지더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편 하늘 저쯤에서 뭐가 타오르지 않고서야, 노랗고 붉은 기운이 저토록 엉겨 붙어 제 경계를 잃어버릴 수가 있나. 그림 따라 보는 이의 속까지 타들어가는데, 저 빛과 색을 만들어낸 화백은 잔잔한 미소만 흘려보낼 뿐이다. “작품에는 천생 작가가 사는 바운더리(영역·한계)가 나오더라”며. 이쯤 되니 더 모를 노릇이다. 그이의 붓을 움직인 게 노을인지 세월인지.
‘중문거리 201908’(2019)이란 타이틀을 단 그림 얘기다. 해 저무는 어느 날 어느 길. 거리에 버티고 선 야자나무가 꽤나 이국적으로 보이지만, 저 안의 배경은 제주 중문이다. 그런데 다들 어디로 가버린 건가. 사람 사는 도시란 ‘사인’은 길을 달리는 차 한 대가 전부. 저 차마저 지나가 버리면 그저 노을만 덩그러니 남을 텐데.
| 김보희의 ‘중문거리 201908’(2019). 해 저무는 어느 날 제주의 중문거리 풍경을 드라마틱한 색감으로 뽑아냈다. 노랗고 붉은 하늘색과 닮은 자동차의 후미등으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꾀했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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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보희(68) 화백. 저 풍경을 끌어안고 그이가 제주에서 외출을 나왔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금호미술관에 연 초대전 ‘투워즈’(Towards) 개막에 맞춰서다. 개인전으론 3년 만. 화백 특유의 화풍으로 채운 풍경·정물화 등 55점을 걸고 50년 화업의 진수를 펼쳤다.
김 화백이 제주로 향한 건 2000년대 중반. 2017년 이화여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이후에는 아예 내려가 정착해버렸다. 제주의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작업실이 있다는 중문 일대는 물론이고 섬 전체가 그이의 붓길에 닿아 있으니. 그 길을 따라 풍경은 풍경인데 풍경만이 아닌 풍경화가 연신 그이의 손끝에서 삐져나오는 중이다.
| 김보희의 ‘더 테라스’(2019). 화백의 정원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책, 테이블, 의자 반려견 네오까지 화백이 애정을 담은 대상을 앞쪽에 들인 뒤 뒷배경은 상상력에 기댔다.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100호(162×130㎝) 8점을 연결해 324×520㎝ 규모로 확장했다(사진=금호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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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 풍경에 얹은 상상력…15m 풍경화 압권
김 화백의 작품세계는 동양적인 철학에 근거한 서양적인 구상회화로 정리된다. 기둥은 역시 풍경. 치밀하게 대상을 묘사한다. 대단히 사실적이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더 있으니 그 바탕에 덧얹은 상상력이다. 빨려들면 들수록 이제껏 보지 못한 지극히 추상적인 광경이 보인다는 얘기다.
출발부터 그랬단다. 1974년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작가생활에 들어선 그때부터 동양적 자연관에 서양물감을 올리는 독특한 작품을 내보였던 거다. 동양 아니면 서양, 구상 아니면 추상이란 이분화한 구도가 전부였던 국내 화단에 어깃장을 놨던 셈인데. 용케 버텨냈다고 할까. 수묵과 채색, 원경과 근경이 뒤섞여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법이 쉽게 먹히진 않았을 테니. 결국 동·서양을 우습게 넘나든 ‘시간’ ‘순환’ ‘자연’ 등의 키워드를 기어이 살려냈다.
| 김보희의 ‘투워즈’(2016)와 ‘투워즈’(2017). 아스라이 보이는 풍경에 알 듯 모를 듯한 숫자를 얹었다. 화백은 “말년이다 생각하니 초조함이 생기고, 이후에 안 보이던 숫자가 보이더라”며 “여행 간 어느 해를 넣기도 하고, 지나가는 세월을 의미하는 365를 넣기도 했다”고 전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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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감 덕인지도 모른다. 그이의 장기이자 특기다. 어느 하나에도 ‘허투루’나 ‘대충’이 없으니까. 세필로 여러 번 덧칠하는 것조차 애정의 발로라고 할 터. 그러니 광대한 자연이든 미세한 생물이든 그이의 눈을 피해 갈 순 없었을 거다. 그 대표작 중 하나가 ‘씨앗’ 시리즈. 2017년 전후로 화백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씨앗’을 클로즈업한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시간의 순환, 불변의 진리를 대신 입혀낸 거라고 할까. 소멸하는 생명체에 기울인 측은지심이라고 할까.
‘자화상’(2019)이 그중 한 점이다. 연두가지에서 뻗친 솜털 같은 수많은 실이 작은 씨앗을 또 품고, 그 곁으론 갈색의 털이 삼단같이 드리워진 정물화. 아무리 봐도 북실북실한 한 식물체를 클로즈업한 작품인데 난데없이 ‘자화상’이라니. 제 몸을 터트린 씨앗이 다 늙어, 길게 수염까지 늘어뜨린 그 모습에서 문득 자신이 보였다는 거다. “늙는 것도 아름답구나” 했다니.
| 김보희의 ‘자화상’(2019). 화백의 ‘씨앗’ 시리즈 중 특별히 ‘자화상’이라 이름 붙인 작품이다. 제 몸을 터트린 씨앗이 다 늙어, 길게 수염까지 늘어뜨린 그 모습에서 문득 자신이 보였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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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하늘의 풍경을 담아낸 십수 점의 ‘투워즈’ ‘인 비트윈’(In Between) 시리즈는 김 화백 풍경화의 또 다른 세상이다. 116×91㎝ 크기의 ‘투워즈’(2012)부터 하늘과 바다 각각을 나란히 붙여 가로·세로 4m의 광활한 전경으로 만든 ‘인 비트윈’(2019)까지. 세심한 붓질은 여기서도 빛을 냈다. 격렬하게 요동치는 바닷속 사정,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속 형편을 ‘푸른’이란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겹겹의 색에 묻혀낸 거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 그들이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살을 맞댔으니.
| 김보희의 ‘인 비트윈’(2019).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 하늘과 바다가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을 맞댔다. 200×400㎝ 규모의 캔버스 두 개를 이어 가로·세로 4m의 광활한 전경으로 만든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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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가 깊고 모두가 넓지만 이번 전시의 압권은 단연 가로 15m에 달하는 풍경화 ‘더 데이즈’(The Days·2011∼2014)라 할 거다. 장장 3년에 걸쳐, 100호(162×130㎝) 작품 27점을 연결해 거대한 한 점(390×1458㎝)으로 완성한 작품. 초록의 우거진 숲은 해와 달, 바다를 품고, 온갖 새와 벌레, 거북이까지 들였다. 없는 것이 없지만 하나가 빠졌다. 사람이다. “신이 천지를 창조할 때 여섯 번째 날 만든 사람으로 인해 세상은 지저분해지지 않았나. 사람은 빼고 대신 원숭이를 넣었다.”
| 김보희의 ‘더 데이즈’(2011∼2014).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자연 속에 들어간 화백의 시선을 응축한 대작이다. 초록의 우거진 숲은 해와 달, 바다를 품고, 온갖 새와 벌레, 거북이까지 들였다. 100호(162×130㎝) 규모 27점을 연결해 거대한 한 점(390×1458㎝)으로 완성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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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수묵화도 그렸고 인물도 그렸더랬다. 지금이라고 딱히 가리는 건 없다. “솔직히 이제 뭐든 못 그리겠는가” 한다. 그저 좋아서, 자꾸 아름다워서 그린다는 거다. “꽃이 보일 때, 산이 보일 때, 나무가 보일 때, 그때그때 덩어리지게 그리는 것뿐”이란다.
△“어느 쪽을 향해서… 어디로 기운다기보다”
김 화백이 대중적인 관심을 끈 계기가 있었다. 2017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내외가 방한했던 그때.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멜라니아 여사를 맞았는데. 손잡은 두 부인의 뒷배경을 장식했던 그림이 바로 화백의 ‘투워즈’(2017·180×280㎝)였다. 언제나처럼 제주 작업실에서 잡아냈다는 사실적 풍광에 역시 상상력을 뒤섞어 빼낸 초록계열의 작품. 청와대가 그날 새벽 한 갤러리에서 대여해 공수했다는 건 나중에 알려졌다.
| 지난 2017년 11월 청와대 본관 접견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방한한 멜라니아 여사와 손잡은 영부인 김정숙 여사 뒤로 김보희 화백의 ‘투워즈’(2017)이 보인다(사진=이데일리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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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얘기를 이제야 들었다. “보도가 나간 이후에 알았다. 청와대로 간 그림이 여사들 뒤에 걸렸으니 기분이야 좋았지. 그해 4월에 전시한 뒤에도 그대로 보관 중이던 그림이 이후에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림이 어디로 팔리는지 민감한 작가들도 적잖지만 김 화백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다. 그냥 내놓고 싶단다. “1만원이라도 공짜는 아니지 않나. 그림 사간 누군가 잘 간직할 것 같아서. 좋은 데 가면 좋은 거 아닌가.”
오랜 화두라 할 김 화백의 ‘투워즈’는 이렇게 계속 이어질 모양이다. 굳이 풀자면 ‘향하여’쯤 될 텐데. “아마 어느 쪽을 향해 그림을 그리고 있겠지, 어디로 기운다기보다는. 결국 나의 모든 것을 그리게 될 거다.” 전시는 7월 12일까지.
| 김보희 화백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금호미술관서 연 ‘투워즈’ 전에 건 자신의 작품 ‘인 비트윈’(2019) 앞에 섰다. 수묵과 채색, 원경과 근경이 뒤섞여 경계를 무너뜨리는 화법으로 화백은 ‘시간’ ‘순환’ ‘자연’ 등의 키워드를 살린, 동·서양을 넘나든 작품세계를 펼쳤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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