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기자와 만난 한 중견 제약사 영업담당 직원은 “무술년 새해 들어 의사들과 만나려고 하는데, 전화통화만 몇번 했을 뿐 아직 얼굴 보고 인사한 적이 한번도 없다”며 “대부분 궁금한 게 있으면 전화할테니 찾아올 필요 없다는 답변이라 답답할 따름”이라고 밝혔다.
△공정경쟁규약 강화 △리베이트 쌍벌제·투아웃제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김영란법) 등에 이어 올해 △한국형 ‘선샤인 액트’까지 시행하면서 제약사 영업직원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상황이다. 선샤인 액트는 제약사나 의료기기업체 등이 의료인에 경제적 이익을 제공할 경우 해당 내역을 보고서로 작성, 5년간 보관해야 하는 제도다. 누가·언제·무엇을·얼마나 등 제공한 내용을 6하원칙에 따라 작성하고 영수증·계약서 등 증빙서류는 반드시 챙겨야 한다. 의료인 자필 서명을 받는 것은 논의 과정에서 빠졌지만, 제약사들은 서명까지 요구하는 분위기다. 혹시 모를 불이익 때문에 명확히 해두자는 취지다. 이 제도가 정착할 경우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거래하는 과정에서 투명성이 한층 높아지고, 시장에서 자정 능력도 커지는 등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한다.
하지만 관련 제도는 시행 초기부터 일선 현장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의료인들이 예민하게 반응한다. 예전에도 의료인들은 제약사가 주최하는 학술행사에 연사로 나선 후 강연료를 받고 사인을 한 후 관련 사진을 남겼다. 하지만 학술행사 등 공식적인 행사 외에 식사와 커피 등 비공식적인 만남에서까지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게 의료인들의 중론이다. 인천 남동구에서 최근 개원한 한 의사는 “제약사 영업사원이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애원해서 밥을 먹기로 했다가, 보고서에 사인까지 해야 한다기에 취소했다”며 “밥 먹을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내 이름이 제약사 장부에 오르내릴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샤인 액트 시행을 맞아 제약사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한다. 우선 의료인들을 만날 일이 있으면 만나되 확실하게 증빙을 남긴다. 또 대면 접촉 없이 질병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 유한양행(000100)과 동아에스티(170900)를 비롯한 대부분 제약사들은 선샤인 액트에 대비하기 위해 전산시스템을 보완했다. 일부 업체는 영업사원이 현장에서 모바일로 바로 내용을 입력하도록 했다. 서류나 영수증을 모아뒀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입력할 경우 누락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제약사들은 온라인으로 의약품과 질병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제공한다. 이는 화이자·MSD·GSK 등 글로벌 제약사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쓰던 방식이다. 의료인만 접속할 수 있는 사이트를 구축, 최신 의학정보와 온라인 강의를 제공한다. 개원의 등 학술대회 등에 참석할 시간이 없는 의료인들은 시간을 아끼면서 최신 의학정보도 접할 수 있어 반응이 긍정적이다.
선샤인 액트로 인해 바뀐 업무 환경이 내심 반갑다는 이들도 있다. 또 다른 제약사 영업담당 직원은 “신입사원 시절에는 의료인 접대를 위해 24시간 대기해야했다면 이제는 저녁과 주말에 어느 정도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며 “회사에서도 예전과 같이 무리한 영업 방식은 지양하는 분위기라 의약품 공부를 더 하거나 가족과 보내는 등에 시간을 더 쓴다”고 말했다.
제약계에서는 리베이트 관행을 완전 뿌리 뽑을 수 잇는 기회로 삼자는 분위기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관계자는 “선샤인 액트 시행과 상관 없이 제약계에서는 반부패경영시스템 ‘ISO37001’을 도입하는 등 강력한 자정 정책을 시행한다”며 “더 이상 리베이트로는 연명할 수 없다는 게 업계 공통된 인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