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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김구 현상금 5만엔, 김원봉 현상금 8만엔”(영화 ‘암살’ 중).
영화 ‘암살’의 누적관객이 1250만명을 넘어서면서 약산 김원봉(1898~1958)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돌이켜보면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특히 백범 김구보다 현상금이 높았다는 영화적 장치는 그가 일제에 맞서 가장 치열한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라는 점을 보여준다.
김영범 대구대 교수는 “실제 1920년대 중반까지 약산은 일제의 체포·암살 1호였다”며 “일제 입장에서 의열단 활동이 경악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중국인을 고용해서 약산 선생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고 말했다.
과연 김원봉은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인정한 독립운동가일까. 정답은 아니다. 김원봉은 의열단 활동과 조선의용군 창설 등으로 백범 김구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양대산맥으로 평가받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분단시대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약산을 망각의 늪에 빠트렸다.
▲남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운동가
의열단 단장을 지낸 남북 정부에서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운동가다. 1948년에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이후 북한 내각에서 고위직을 지내다 1958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 역시 약산을 독립운동가로 공식 인정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운동가를 공식 인정하는 방법은 훈장을 추서하는 것이다.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이 있는데 건국훈장의 경우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 5개 등급으로 나뉜다. 안중근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유관순 열사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약산은 왜 못 받았을까. 이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분단 이후 북한정권에 참여했기 때문.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유족의 신청으로 건국훈장 추서가 논의됐지만 무위에 그쳤다. 독립운동의 증거가 부족한 게 아니라 북한정권에 참여한 게 문제가 됐다.
한 역사학계 원로는 “약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 요즘의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서훈을 받지 못했지만 독립운동은 진실”이라면서 “북한에서 고관대작을 하지 않았다면 진작 대한민국 정부가 서훈했어야 할 분”이라고 말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건국 이후 반국가활동, 한국전쟁 때 부역행위,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 또는 적극동조한 경우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제외된다”고 밝혔다. 1995년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약산의 부인 박차정 여사가 만약 1944년에 사망하지 않고 해방 이후 남편을 따라 월북했다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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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인명사전에는 포함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는 아직 독립운동인명사전이 없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해방 이후 70년이 지나도록 미완의 과제였다. 독립기념관은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편찬’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첫발을 내디뎠다. 총 투입 예산만도 62억원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맞는 2019년 발간이 목표다. 과거 민간 주도로 친일인명사전이 만들어진 적은 있지만 민관을 통틀어 공식적인 독립운동인명사전 발간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상자는 1만 6000여명이다. 이미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거나 향후 5년간 포상을 받을 인사까지 포함한다. 이밖에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사람은 추후 실무 논의를 거쳐 추가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약산은 과연 독립운동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1948년 8월 제1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2년 북한 노동상, 1956년 북한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7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낸 약산의 경력을 고려해 볼 때 쉽지 않다. 참여정부 시절 몽양 여운형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논란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 공적심사는 가까스로 통과했지만 몽양의 사회주의 활동 때문에 서훈 1급인 대한민국장 아래인 대통령장을 서훈하면서 유족이 반발한 것. 아울러 보수단체가 서훈철회를 요구하면서 진통이 적지 않았다.
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위원회 관계자는 “사전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도 원칙적으로 포함하지만 북한에서 정권을 잡고 대한민국에 적대행위를 한 인사는 제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학문적으로는 약산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편찬위원 대다수의 의견”이라고 밝혔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사전의 기준의 애매하다”며 “용어와 내용이 합당해야 한다.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독립유공자 사전을 만들 경우 논쟁할 필요가 없지만 독립운동인명사전으로 할 경우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약산 같은 인물이 빠져서는 독립운동사가 구성이 안 된다”며 “분단이라는 어려움이 있지만 통일에 대비한 온전한 역사복원을 위해 확장적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독립운동인명사전의 구체적인 대상자 선정은 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 국가보훈처의 회의를 거쳐 다수 의견에 따라 결정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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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이란
1919년 11월 만주에서 결성한 무정부주의 성향의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義烈團)은 정의(正義)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는 뜻. 약산 김원봉이 단장을 맡았고 단원들은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요인 암살과 국내외 일제 관공서 파괴 등 급진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6년부터 독립운동의 주류로 떠오른 사회주의 이론을 수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