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최선 기자] 점호 때 실수를 하는 날이면 밤새 침상에서 베개에 머리를 떼고 땀을 흘렸다. 매일 같이 쪼그려 앉아 부대 복도를 구둣솔로 청소했다. 걷지 못할 정도로 허벅지를 얻어맞는 날도 많았다. 팬티를 내린 채 걸레질을 했고 성기를 농락당한 적도 있었다.
지난 4월 집단구타와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윤 일병의 수사기록을 살피다 약 10년 전의 일들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병영 곳곳에서 제2, 제3의 윤 일병 이야기가 들리고 있다. 남성들은 바뀌지 않은 병영을 보며 아려오는 가슴을 억누를 수밖에 없다.
사회는 빠르게 민주화하고 있다. 가정과 학교의 비이성적 권위도 많이 해소됐다. 그런데 유독 군대는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전문가들은 주로 20대 초반인 병사들이 첫 조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분석한다. 한창수 고려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요즘 20대 초반 남성은 조직에 대한 내성이 약하다”며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군대에서의 경험은 일종의 ‘투사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투사는 갑작스런 위기 상황이나 환경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을 남의 탓으로 전가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부모한테서 혼난 첫째 아이가 동생에게 분풀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아 형성이 완전치 않은 20대 초반에 겪는 문화 충격이 병사 간 구타·가혹행위·성추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제대 후 청년들은 사회 곳곳의 일꾼이 된다는 점이다. 군대에서 배운 조직문화는 각계 직장에 이식된다. 병영에서 스민 비이성적인 조직문화가 대한민국을 좀 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제는 군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야 한다. 군대를 병력 보관소가 아닌 인성 교육의 장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국방 옴부즈만 등 민간이 참여하는 병영 혁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군은 10년 전과 같은 대책만 내밀며 이 난관을 회피하려는 듯하다. 군 수뇌부들이 스스로 개혁하겠다는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되려 이 사회의 일꾼을 기른다는 심정으로 이 사안을 들여다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