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도년 기자] 저는 체크카드입니다. 무분별한 소비를 부추기는 신용카드가 바람난 ‘애인’이라면 저는 알뜰살뜰 살림을 챙기는 ‘아내’ 같은 존재지요. 정부에서도 저를 자주 써 달라고 소득공제율을 30%로 높여줬습니다.
그런데 제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요. 자정부터 약 10분 동안은 쓸 수가 없습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님도 저의 이런 ‘신데렐라’ 기질을 알고 크게 노하셨습니다. 저 얄미운 신용카드처럼 24시간 끊김 없이 주인님을 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를 발급한 은행과 주인님이 예금계좌를 튼 은행이 다를 때는 이 시간이 40분씩이나 길어진다고 하니, 죄송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주인님이 생신을 맞은 날이었어요.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 묵겠지”라는 유행어를 입에 달고 사는 주인님은 친구들과 소고기 잔치를 했습니다. 잔치가 끝난 시각은 밤 12시2분. 주인님은 “오늘은 내가 쏜다”고 외치며 계산대로 돌진해 저를 꺼냈지만, 결제가 되질 않았습니다. 우르르 몰려나온 주인님의 친구들. 이 시간에 체크카드 결제가 안 되는지 모르는 친구들은 “돈 없냐? 그냥 우리가 살 테니 다음에 한턱 사라”며 주인님 속도 모르고 신용카드를 긁어댔습니다.
택시를 탈 때도 그랬습니다. 부서 회식을 마친 주인님이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한 시각도 밤 12시1분. 저는 다시 신데렐라가 됐습니다. 지갑에 현금도 없었던 주인님은 택시 기사님께 “가진 건 도서상품권뿐인데, 이 걸론 어떻게 안될까요?”라며 비굴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은행 전산상의 날짜 변경 작업 때문이랍니다. 자정 무렵에 발생하는 금융거래 정보를 날짜가 바뀌는 데 따라 가르마를 타줘야 하는 데, 이 과정에서 고객정보통제시스템(CICS)과 고객 금융정보데이터베이스(DB2) 등 전산 프로그램을 잠시 멈췄다 다시 구동하게 됩니다. 이때 걸리는 시간이 5~10분 정도지요.
저의 철천지원수 신용카드는 날짜를 바꾸는 동안 BC카드 전산망을 활용해 24시간 중단 없는 거래를 할 수 있는데, 저는 왜 이런 설움을 겪어야 하는 걸까요.
물론 저도 24시간 중단 없이 주인님을 도울 수 있답니다. 한 시중은행 전산 담당자는 “거래가 중단된 시간에 일어나는 거래 정보를 백업 시스템에 따로 모으고 날짜를 바꾼 뒤에 이를 한꺼번에 적용하면 ‘신데렐라 현상’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산 설계 구조 전체를 바꿔야 하는 일이라 실제로 적용하기엔 대단히 어렵다”고도 합니다.
태국의 한 백화점에서 저를 꺼냈다가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했던 김석동 금융위원장님도 최근 체크카드 활성화를 위해 이런 ‘신데렐라 현상’을 해결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조만간 저도 신용카드처럼 언제든지 편리하게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할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