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부자되기'' 열풍]검은 머리 파뿌리 돼도 계산은 확실히

조선일보 기자I 2005.11.29 07:31:37

20대 미혼자 절반 넘게 "혼전 계약서 쓸 용의"
이혼 대비한 ''나눠갖기'' 아닌 재산관리 목적

[조선일보 제공]

지난 19일 오후 3시, 서울 강남역 부근 K금융컨설팅 회사. ‘노후(老後)와 시간’이라는 주제로 재테크 강좌가 열렸다. 수강생 20여명은 모두 20대.

“결혼을 몇 번이나 할 것 같으세요? 두 번, 세 번? 앞으론 평균 수명이 100세가 될 텐데, 여러분은 그동안 결혼을 몇 번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결혼 비용을 많이 지출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강사가 “여러분 세대는 부부 간 금전 관계도 결혼 전에 확실히 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라고 충고하자, 수강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층의 돈에 대한 관심이 부부관계를 초월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함께 벌고 함께 쓰자는 식의 ‘부부 경제’는, 언제든 남이 될 준비가 돼 있는 신세대 부부들에겐 흘러간 교과서에 불과하다.

이 같은 추세를 극단적으로 반영하는 현상이 바로 ‘혼전(婚前)계약서’ 작성이다. 혼전계약서란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가 금융·부동산 자산에 대해 미리 문서형식으로 약속하는 것으로 미국이나 대만에서는 이미 보편화돼 있다. 정식 명칭은 ‘부부 재산 약정서’. 약정서를 등기소에 등록하면 법적 효력이 발생한다.


‘부부의 월급과 상속재산은 공동 명의로 한다. 각자의 주식투자와 신탁수익금, 자동차는 별도의 재산으로 각자 관리한다. 주택은 남편과 아내가 6:4의 비율로 재산권을 행사한다. 만약 이혼하게 되면 이 약정에 따라 재산이 분할된다.’

이상호(35·회사원), 이지용(30·주부)씨가 2001년 6월, 결혼식을 올리며 작성한 ‘혼전계약서’ 내용이다. A4 용지 다섯 장 분량에 총 12조로 구성돼 있다.


“이혼을 염두에 두고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 아닙니다. 좀 더 합리적이고 평등한 방식으로 재산을 관리하기 위한 목적이었어요. 그 결정이 옳았다고 봐요.”







남편 이씨는 “부부가 500만원 이상을 초과해 보증을 서는 경우, 상대방의 서면(書面)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주변에서 보증을 서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없다”며 웃었다. 둘 중 한 사람이 재산을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들 부부는 민법 828조에 규정된 ‘부부재산약정제도’를 국내 처음으로 활용한 제1호 커플이다.


내년 3월에 결혼을 앞둔 주성호(28·회계사)씨와 신예진(26·교사)씨도 혼전계약서를 심각하게 고려 중이다. 신씨는 “이미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약정서 약식을 다운받아 열 가지 항목에 걸쳐 꼼꼼히 채워 넣어 봤다”며 “처음부터 룰을 정해놓고 결혼생활을 시작하면 월급 통장을 두고 서로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고 비자금을 만드느라 진땀 뺄 필요도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젊은층의 혼전계약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자 결혼정보회사 ‘선우’에서는 최근 매주 월요일마다 고문 변호사가 혼전계약서 작성을 상담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진 이씨 부부처럼 법적인 효력이 발생하는 ‘혼전계약서’를 쓰는 커플은 소수에 불과하다.

최근 조선일보와 듀오(결혼정보회사)가 20대 미혼남녀 363명에게 ‘혼전계약서 작성 여부’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절반 이상인 52.3%가 “쓸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지난 2001년 듀오의 조사에서 40.9%가 “쓸 의향이 있다”고 말한 것에 비하면 4년 만에 10%포인트 넘게 증가한 수치다. 특히 “계약서를 쓰겠다”는 남성 응답자는 2001년 17.7%에서 2005년 41.2%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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