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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상 이 작품]스토리 힘·音 보조…뮤지컬史 진화 보여줘

김미경 기자I 2022.04.14 06:10:00

심사위원 리뷰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2022년 국립정동극장 첫 창작 초연작
인물·스토리 앞장, 음악은 보조
네불라 역 강기둥 역량 제대로 드러나
주체적이진 않지만 제몫 다하는 삶 그려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 우리는 자기 깜냥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평범한 존재일 뿐인데 세상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성공이나 발전을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드는 지금의 사회를 피로사회로 규정했다. 창작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이하 ‘쇼맨’)는 스스로를 피로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지만 제 몫을 다하는 많은 범인들을 위로하는 작품이다.

작품은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 수아의 시선에서 특이한 이력을 지닌 가상의 독재 공화국 파라디수스 출신의 노인 네불라의 삶을 쫓아간다. 네불라는 어린 시절 자신이 다른 사람을 흉내 내는 탁월한 능력을 발견한다.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흉내만 내는 그는 좋은 연기를 해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독재자 미토스의 거리 유세를 대신할 네 번째 대역배우로 발탁돼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독재자를 대리한다.

뮤지컬 ‘쇼맨’의 한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사진 촬영을 빌미로 그간의 삶을 수아에게 들려주었던 네불라는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주기를 부탁한다. 평생 누군가를 흉내냈고 심지어 독재에 부역하는 행위를 했지만 그때를 가장 빛나고 살아있는 순간으로 느끼는 네불라를 수아는 경멸한다. 그러나 수아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국으로 입양돼 장애가 있는 동생의 보모로 살아야 했던(했다고 생각하는) 수아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빠진다. 또 다시 버려지지 않기 위해 착한 아이가 돼야 했고 스스로를 보모로 만들었다. 동생을 방치하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고가 나고 동생이 다치면서 집에서 도망친 그는 마트에서 매니저를 대리하게 된다. 대형마트의 시스템 속에서 부품처럼 대역을 요구받는 그는 네불라의 삶을 떠올린다.

네불라의 노래 ‘인생은 내 키만큼’이 작품을 연다. “인생은 내 키만큼 깊은 바다 파도는 계속 쉼 없이 밀려오는데 나는 헤엄칠 줄을 몰라 제자리에 서서 뛰어오른다.” 네불라의 삶을 은유하는 이 노래는 마지막에 다시 반복되는데 코러스들이 네불라와 함께 제 키만큼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대열에 동참한다. 주체적인 삶을 찾지 못했던 네불라는 또 다른 수아였고,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라는 듯.

음악은 극을 주도적으로 이끌기보다는 인물과 스토리를 앞장세우고 보조를 맞추며 극을 돕는다. 흔히 뮤지컬은 음악이 주인공이라고 말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스토리의 대역이 돼준다. 음악이 주도적으로 앞장서는 뮤지컬도 있지만 인물과 스토리가 진지하고 무거울 때는 이를 잘 받쳐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뮤지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네블라의 삶을 상징하는 듯한 트럼펫의 사용은 돋보인다. 트럼펫이 얼마나 웅장하면서도 쓸쓸하고 슬픈 음색을 지녔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네불라와 수아 역 이외에 네 명의 배우가 수많은 역할을 맡으며 드라마적으로나 음악적으로 훌륭한 앙상블을 이뤄낸다. 네불라 역의 강기둥과 수아 역의 박란주는 매 작품에서 충실히 제 몫을 다했지만 작품에 묻히곤 했던 개인적 역량을 이 작품에서는 제대로 드러낸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한 인물을 작가는 주목해 썼고 배우는 돋보이도록 연기했다.

매해 수많은 창작 뮤지컬이 쏟아지지만 작품성이나 다양성 면에서 큰 발전을 보여주진 못했다. 뮤지컬 ‘쇼맨’은 한국 뮤지컬사에서 큰 보폭의 진화를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이 창작 뮤지컬의 발전을 견인하는 좌표가 됐으면 한다. 2022년 국립정동극장의 첫 초연작인 ‘쇼맨’은 다음달 15일까지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공연한다.

뮤지컬 ‘쇼맨’의 한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뮤지컬 ‘쇼맨’의 한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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