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회고록’이란 돌발변수가 정치권을 진영 싸움에 매몰시키며 정치 현안을 모두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작용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2007년 11월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서 기권할 때 북측에 미리 물어보고 했느냐, 아니면 결정한 후에 통보했느냐가 쟁점이다. 후자라면 당시 한반도 상황에서 고려할 여지라도 있겠지만 전자라면 문제가 다르다. 더욱이 내년 대선에서 유력 후보로 간주되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관련 여부가 눈길을 끈다.
보수 진영은 ‘평양의 결재’에 따른 결의안 기권은 외교적 굴욕이라며 문 전 대표를 곧장 겨냥했다. 송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최근 발간한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던 문 전 대표가 안보정책조정회의 결정을 주도했다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사퇴 공세와 미르·K스포츠재단 및 최순실씨 의혹 등으로 궁지에 몰린 여권은 ‘국기문란’, ‘내통’ 등의 자극적 표현을 써가며 국면 전환을 꾀하는 모양새다.
이에 대해 문 전 대표는 페이스북에서 “내통이라면 새누리당이 전문 아닌가”라며 북풍, 총풍 등 새누리당 전비(前非)를 물고 늘어졌다. 처음에는 다수의 의견을 듣는 노무현 정부의 의사결정 방식을 “박근혜 정부도 배워야 한다”며 외려 자랑하더니 이젠 측근들을 내세워 “그런 사실이 없다”, “미리 결정한 후에 통보했다”며 말을 바꾸기에 바쁘다. 진보계가 문 전 대표 지원 사격에 벌떼처럼 나선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나 국민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런 식의 물타기나 말바꾸기로 진실을 호도하는 술책은 통하지 않는다. 공작정치를 규탄해야 하지만 관계자 사법처리까지 끝난 과거사에 기대어 사태를 어물쩍 넘기려 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송 전 장관은 여전히 “기록대로 썼다”며 논란을 일축하고 있다. 그를 국가기밀누설죄로 고발해야 한다는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의 주장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회고록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다.
문 전 대표는 “사드 배치도 북한에 물어볼 텐가”라는 비아냥이 쏟아지는 현실을 직시하고 사건의 전말을 직접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 기록물을 공개하는 수밖에 없다. 여권도 각종 의혹을 덮는 호재로만 볼 게 아니라 차분한 진실 규명으로 국기를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