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순원 기자]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는 다음 미국 대통령과는 어울리는 구석이 별로 없다. 매사에 시끄럽고 무례하며 거만하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다.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들마저 트럼프를 ‘로데오 광대’에 비유하곤 한다. 대통령이 될 그릇은 아니라는 뜻이다. 언론은 한술 더 뜬다. 그의 선거 캠페인을 ‘한편의 쇼’처럼 평가한다.
이런 세간의 시선에도 트럼프는 여전히 잘나간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다른 공화당 후보를 압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번이면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막말을 시도 때도 없이 쏟아내도 그의 인기를 끌어내리지 못한다.
◇막말 종합세트…여성비하 발언이 결정판
트럼프는 11일(현지시간) 미시간 주(州) 버치 런에서 열린 공화당 모금행사에서 중국의 위안화 평가절하를 겨냥해 “미국의 피를 빨아먹는다”며 특유의 거친 발언을 쏟아냈다. 지지자 2800여 명 앞에서 50분 간 연설한 트럼프는 중국뿐만 아니라 막말 레이스의 시초가 된 멕시코에 대한 공격도 이어갔다.
그는 지난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멕시코는 문제가 많은 사람을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 이들은 성폭행범이고 마약, 범죄를 가져오고 있다”고 주장해 히스패닉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돈을 많이 벌어들이면서도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있다며 “한국은 미쳤다(crazy)”고 했다.
그의 막말 파문의 결정판은 폭스뉴스의 여성 앵커 매긴 켈리 비하 발언이다. TV 토론회에서 날카로운 질문 공세를 퍼붓자 트럼프는 “토론회를 진행하던 그녀의 눈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다른 어디에서도 피가 나오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켈리가 ‘월경 증후군’ 때문에 자신을 괴롭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이었다. 그의 발언 이후 미국 전역이 논란으로 들끓었을 정도다.
◇‘대리만족’ 에 트럼프에 열광
수많은 논란에도 그는 공화당 내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트럼프 현상은 그가 공화당 지지자의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줬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진보성향이 한층 짙어졌다. 오바마 케어, 동성결혼 합헌, 쿠바와 수교를 포함해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인 보수적 백인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일 투성이다. 게다가 백인은 아시아인과 히스패닉 비중이 늘어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던 터라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감도 커졌다. 트럼트가 이런 정책에 대해 직설적인 비판을 쏟아내자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언 부르마 미국 바드대학 교수는 “(트럼프 지지자는) 멕시코인을 싫어하고 고학력자를 불신하며 아버지가 흑인인 대통령이 선출됐다는 사실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꼬집었다.
트럼피즘의 근본적 원인을 기존 정치판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과 관련짓는 해석도 많다.
미국 사회에서 민주 공화 양당체제가 오랜 기간 유지되면서 타협과 협력이 전통이 됐다. 이념적인 차이도 무뎌지면서 미국 유권자 사이에서는 공화당이나 민주당 소속 정치인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분위기다. 두 정당 소속 정치인이 ‘그밥에 그나물’이란 것이다.
유권자들은 트럼프가 기성 정치인들과는 달리 직설적 발언을 쏟아내는 모습에 끌리는 것이다. 워싱턴과 관계가 없는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가 기성 정치판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됐다.
이언 부르마 교수는 “부패한 엘리트를 정권의 중심에서 쫓아내겠다고 약속하는 포퓰리즘 정치인이 인기를 끄는 것은 흔히 목격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인기 지속할까
전문가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평가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980년 이후 대선후보 선출과정을 분석한 결과 동료 정치인들과 공화당 지도부의 지지, 정치자금 모금 실적, 첫 경선지(아이오와, 뉴햄프셔)의 여론 등이 초기의 전국단위 여론조사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미 경선 불복 시사 발언과 천박한 언사로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고 있어 트럼프 거품은 곧 꺼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일은 내년 11월 8일 예정이다. 앞으로 1년 3개월이 더 남았다. 장기레이스에서 트럼프가 막말과 구설을 극복하고 미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는 쉽지 않다는 뜻이다. 공화당 내부에서도 그의 좌충우돌식 행보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분석도 있다. 월가의 억만장자이자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트럼프의 돌풍은 ‘반짝 불꽃’이 아니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트럼프는 말실수가 좀 과하긴 하지만 그것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견고한 지지기반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