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미국인은 외상을 좋아한다. 신용카드를 그어 생활비를 앞당겨 쓰고, 은행 돈을 빌려 집과 자동차를 산다. 월급을 받아 카드대금을 메우고 은행 대출금을 갚아나가다 보면 저축통장에 한 푼도 안 남는다.
부채(負債) 생활이 오래 거듭된 결과 미국의 가계저축률(소득에서 저축이 차지하는 비율)은 요즘 ‘마이너스’(-1.4%)로 떨어져 있다. 대부분의 미국 가정이 번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쓰는 적자생활을 하는 셈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인의 삶도 고달픈 미국인의 삶을 닮아가고 있다. 1998년 24.8%에 달했던 가계저축률이 매년 2~3% 포인트씩 하락하더니 지난해 4.4% 선으로 급락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하락 속도다.
노동연구원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도시 가구의 35%가 저축을 한 푼도 못하고 있다. 한국인이 미국인들처럼 신용카드를 마구 그어대는 것도 아닌데 왜 살기가 힘들어졌을까.
삼성경제연구소 김경원 박사는 “IMF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자녀 사교육비, 내 집 마련 과정에서 떠안은 은행 차입금이 가계살림을 짓누르고 있다”면서 “이 추세가 바뀌지 않으면 가계저축률이 1~2%대까지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국수력원자력㈜에서 21년째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이인호 부장(48)은 전형적인 중산층 샐러리맨이다. 그러나 그는 10년째 저축을 한 푼도 못하고 있다. 중·고교생인 2명의 자녀에게 매달 260만원 이상의 사교육비를 쓰는 탓이다. 그는 “평생고용이 무너진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밥벌이’ 기술을 익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처분소득의 40~50%를 사교육비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부장과 같은 학부모들이 지난해 지출한 사교육비는 24조원(GDP의 3%)이 넘는다.
IMF 이후 나타난 저금리 현상은 저축 의욕을 약화시키고 서민·중산층 구별 없이 은행 돈을 빌려 집을 사는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은행원 조성만씨(45)는 3년 전 서울 중계동에서 45평 아파트를 분양받으면서 20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3억원을 빌렸다.
그가 매달 갚아나가는 원리금은 215만원. 조씨는 “마치 ‘할부 인생’을 살아가는 기분”이라며 “은행 빚을 갚고 애들 과외비 쓰고 나면 돈이 항상 부족하다”고 말했다.
금융기관이 최근 3~4년 사이에 아파트 구입자에게 빌려준 주택담보 대출금은 200조원에 달한다. 대출금리를 6%로 잡아도 이자가 연간 12조원에 이른다. 삼성금융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도시민의 금융부채는 가구당 평균 3000만원까지 늘어났다.
여기에 매달 2~4차례의 외식, 40만~100만원씩 들어가는 자동차 운행경비, 가구당 2~4대에 달하는 휴대폰 이용료를 내다보면 저축은 꿈꾸기조차 어려워진다.
IMF 이후 크게 늘어난 세금과 사회보험료도 가계살림에 부담이 되고 있다. 국민 1인당 세금부담액은 2000년 242만원에서 지난해 338만원으로 늘어났다. 건강보험료와 국민연금보험료도 매년 3~6%씩 오르고 있다.
금융연구원 박재하 박사는 “세금 증가는 가처분소득을 줄여 저축률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온다”면서 “한국과 미국 중산층의 삶을 비교해보면 한국 쪽이 더 피곤한 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