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래드클리프는 36km가량 달린 뒤 복통을 호소하며 도전을 멈췄다. 금메달 유망주의 갑작스러운 기권에 영국인들은 분노했다. 언론은 그를 ‘포기자(quitter)’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래드클리프에게는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나약한 인간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올해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20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 체조 선수 시몬 바일스가 심리적 압박을 이유로 기권했다. 그는 지난달 27일 도쿄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여자 기계체조 단체전 결승에서 첫 종목 도마에 출전한 직후 나머지 종목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바일스를 금메달 유망주라고 소개하던 언론은 이 소식을 긴급 타전했다. 바일스는 이후 경기에도 잇따라 불참했다.
바일스는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0개의 메달을 획득하며 체조 역사를 새로 쓴다는 평가를 받아온 전설적 선수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기권 이유로 “심리적 중압감”을 언급하면서 “올림픽에 출전해 주인공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경기 이틀 전에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종종 어깨에 온 세상의 짐을 진 것처럼 느껴진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이번엔 바일스를 향한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워싱턴포스트와 CNN 등 미국 언론은 바일스의 용기있는 결단을 지지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트위터에 “바일스가 받아야할 것은 감사와 지지다. 여전히 GOAT(Greatest Of All Time·사상 최고)이다”라고 올렸다. 바일스의 후원사인 비자, 애슬레타, 코어파워 등도 지지 성명을 냈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묻는다면 주저없이 바일스의 기권과 미국인들의 격려를 꼽고 싶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국가대표 선수들도 결국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해줬기 때문이다. 세계 신기록 보유자도 배가 아파서 달리지 못할 수 있고, 금메달 유망주도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출전을 못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인 그들에겐 언제든지 그만 둘 권리가 있고, 이러한 결정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바일스의 기권 소식이 전해진 직후 래드클리프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중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며 “단지 우리의 몸이 경기를 할 수 없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정신과 육체의 조화가 필수적인 운동경기에서 기권했다는 이유로 포기자라는 낙인을 찍지 말라는 호소로 읽힌다.
실제로 래드클리프는 2005 런던 마라톤, 2005 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08 뉴욕 마라톤 등에서 잇따라 우승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바일스 역시 앞으로 수많은 대회를 석권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미국 언론은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가. 그는 이미 아무도 쓰지 못한 역사를 쓴 체조의 전설이다. 포기자라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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