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범인과 사투 벌이는 ''고시원 사건'' 생존자들

노컷뉴스 기자I 2008.11.01 10:17:00

꿈 속에서도 범인과 싸우는 악몽 되풀이

[노컷뉴스 제공] "밤마다 다시 범인을 만납니다.""범인이 웃으면서 제게 칼을 휘둘러요. 악몽 때문에 미칠 것 같아요"

강남 고시원 방화살해 사건의 범인 정 모씨와 처음으로 맞닥뜨려 흉기에 찔렸던 피해자가 의식을 되찾고 끔찍했던 사건 당일의 기억을 증언했다.

29살 김 모씨가 사건 당일(20일) 고시원으로 돌아온 것은 범행이 시작되기 불과 몇 십분 전이었다. 새벽 일을 마치고 돌아온 김 씨는 여느 일요일 아침처럼 밀린 빨래를 하려고 옷가지를 챙기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들려 온 "불이야"하는 여성의 다급한 목소리. 비극의 서곡이었다.

김 씨는 3층 복도로 나가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들고 희미하게 연기가 새어나오는 방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소한 불이겠거니" 하고 고시원 복도 모퉁이를 도는데, 날카로운 금속성 이물질이 살갗을 파고드는 느낌이 번쩍하고 들었다. 대응할 틈도 없었다. 그리고 또 다시 한번.

김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검은 색 옷을 입고 중무장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나를 공격했고, 본능적으로 범인을 밀쳐낸 뒤 도망쳤다"고 말했다.

흉기에 찔린 배를 한 손으로 부여잡은 채 그는 다른 한 손으로 흉기를 막아낸 뒤 문이 열린 고시원 총무실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 112를 눌렀지만, 내선 전화인 탓에 외부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 때 검은 그림자가 다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김 씨는 서둘러 문고리를 붙잡고 버텼다. 하지만 범인 정 씨는 문을 발로 차며 끈질기게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순간 엄마, 아빠, 형, 누나...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떠올랐어요. 문이 열리면 죽을테니 잠시라도 엄마가 보고 싶었어요"

김 씨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할 무렵, 연기가 각 방으로 새들어가면서 고시원 사람들이 뛰쳐 나오기 시작했다.

김 씨에 따르면 범인 정 씨는 다른 사람들이 나오는 소리를 듣자 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김 씨에게는 죽음이 비껴가는 순간이었지만 다른 피해자들에게는 죽음이 찾아든 순간이었다.

김 씨를 두고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간 정 씨는 그렇게 6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6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 밤마다 범인과 만나는 악몽에 시달려

김 씨는 결국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고 3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 깨어났다. 그러나 김 씨가 온전한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며칠 되지 않았다.

김 씨의 아버지 기현씨(57)는 아들의 상태에 대해 "아들이 공포감에 휩싸여 '병실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하며 최근까지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김 씨는 CBS 기자와 만난 31일에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밤마다 찾아오는 악몽이 여전히 김 씨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밤마다 다시 범인을 만납니다.범인이 웃으면서 제게 칼을 휘둘러요. 악몽 때문에 미칠 것 같아요"

김 씨는 "너무 너무 억울하다"며 "병원에서도 갑자기 누군가 들어와서 흉기를 휘두를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곤 한다"고 말했다.

김 씨가 입원해 있는 순천향병원 관계자는 "한 달 뒤 소장과 간 수술의 실밥을 뽑을 예정이지만, 그 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 일주일 치료에 7백만원, 병원비 걱정에 살 길도 막막

김 씨는 30일 일주일간의 치료비를 먼저 정산해달라는 청구서를 병원 측으로부터 받았다. 일주일 간의 치료비만 무려 7백만원.

야식 배달일을 하는 김 씨에게 7백만원은 도저히 마련할 길이 없는 거금이다. 김 씨는 "구청에서 3백만원을 지원해줬지만, 아직 한 달은 더 치료를 받아야 되는데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병원비만 수 천만원의 빚을 지고, 게다가 인대와 힘줄마저 끊어져 버린 손으로, 이제 뭘 해먹고 살아야 되느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 씨의 범행은 무고한 6명의 생명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새겨놓고 말았다.

'사람이 무서워져버린' 김 씨의 마음과 만신창이가 돼버린 몸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김 씨는 오늘 밤도 범인 정씨와 꿈 속에서 생과 사를 오가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