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개봉한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을 연기한 전지현이 살인청부업자 하와이 피스톨 역을 맡은 하정우에게 한 말이다. 영화는 흥미로운 줄거리와 배우들의 호연 덕택에 기록적인 흥행 성공을 거뒀을 뿐 아니라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여주인공 이미지 설정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름은 의열투쟁(개인이나 소규모 조직으로 암살과 폭파 등을 감행하는 독립운동)에 앞장선 대표적 인물 세 명(안중근·김상옥·윤봉길)에서 땄고, 캐릭터는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의사를 모델로 삼았다.
의사(義士)와 열사(烈士)는 사전적 의미에 큰 차이는 없으나 국가보훈부는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순국선열(殉國先烈) 가운데 무력으로 항거한 인물은 의사, 유관순처럼 맨몸으로 저항한 인물은 열사로 구분한다. 광복 후 숨진 인물은 애국지사(愛國志士)라고 부른다.
독립유공자 1만7748명 중 여성은 639명으로 3.6%에 불과하다. 최근 들어 여성 독립운동사 발굴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해진 덕에 그나마 오른 비율이다. 2018년까지는 2%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가운데서도 의사라고 일컫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서너 명에 불과하다. 당시 가부장적 풍토에서는 여성 역할이 극히 제한됐기 때문이다.
1872년 경북 영양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세에 결혼한 남자현도 여느 아낙네처럼 살았다. 1895년 을미의병에 가담한 남편 김영주가 이듬해 전사한 뒤에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유복자인 3대독자를 키우는 일에 정성을 쏟아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항거해 친정아버지 남정한이 궐기하자 의병에 뛰어들었다.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후방을 교란하며 아버지를 도왔다. 1919년 2월 말 서울로 올라와 3·1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한 뒤 3월 9일 아들 부부를 데리고 만주로 떠났다.
남자현은 독립군 뒷바라지와 여성 계몽운동에 헌신했지만 목표는 오로지 남편의 원수를 제 손으로 해치우는 것이었다. 이를 한시도 잊지 않으려고 남편의 피 묻은 군복을 속에 입고 다녔다. 사대부집 며느리로 손자까지 딸린 중년 여성이 무장투쟁에 나선다는 것은 중세 프랑스의 소녀 전사 잔다르크만큼이나 이례적이고 희귀한 일이었다.
1926년 4월, 식민통치의 수괴인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권총을 품고 서울로 잠입했다가 경계가 삼엄해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1932년 9월에는 왼쪽 약지 두 마디를 잘라 흰 수건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고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을 싸서 국제연맹의 빅터 리턴 만주사변 조사단장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여호(女虎)나 여비장(女飛將)으로 불리던 그에게 ‘여자 안중근’이란 별명이 추가됐다. 1933년 2월에는 만주국 일본대사이자 관동군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할 목적으로 권총과 폭탄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 집을 나섰다가 일본 형사에게 붙잡혔다. 감옥에서도 단식을 벌이는 등 독립투쟁 의지를 굽히지 않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뒤 고문 후유증으로 그해 8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남자현은 죽기 전 아들(김성삼)과 손자(김시련)를 불러 전 재산인 249원 80전을 건네며 이 가운데 200원을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라고 당부했다. 아들은 이를 고이 간직해오다가 광복 후 첫 삼일절 기념식에서 김구 임시정부 주석에게 전달해 유언을 지켰다. 유해는 하얼빈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대한민국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1967년 국립서울현충원에 가묘를 만들었다. 유해 봉환을 위해 1998년 후손들이 발굴에 나섰으나 찾지 못했다. 중국 국적이던 외증손녀 강분옥 씨와 그의 아들 김림위 씨는 각각 2012년과 2017년 특별귀화 조치로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오는 22일 남 의사 순국 90주기를 맞는다. 그가 압록강을 건널 때 뼈에 새겼던 한과 가슴에 품었던 꿈은 이제 풀리고 이뤄진 것일까? 우리는 아직 남 의사에게 진 빚을 다 갚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