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훈장’ 유의배 성심원 주임신부 인터뷰
소록도 다음으로 많은 한센인, 이젠 62명
“아프리카 등 아직 한센인 많아…잊지 말아야”
어느덧 70대 중반…“건강허락할 때까지 머물 것”
[경남 산청=이데일리 조민정 기자] “한국은 이제 부자 되고 돈이 많아져서 한센인이 별로 없죠…그렇지만 부자가 아닌 나라, 돈 없는 나라엔 여전히 약도 없어서 힘든 한센인이 많아요, 이들을 기억해야 해요.”
짧은 머리와 달리 가슴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을 가진 유의배(77·본명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 신부는 43년째 한센인을 돌보는 산청성심원 주임신부다. 1980년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줄곧 한센인과 함께 살아왔다. 이역만리에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한 공로로,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 표창장을 받은 데 이어 최근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 43년째 한센인을 돌보는 유의배(77·본명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 신부가 2월 28일 이데일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조민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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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신부는 지난달 28일 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예전에 성심원에 들어올 땐 다리 앞에 차단문이랑 경비원이 있어서 왜 왔는지, 누구인지 설명해야 들어올 수 있었어”라고 회상했다. 문드러진 얼굴과 쉽게 전염된다는 편견 때문에 “소록도에 가라”, “여기서 나가라”며 마을 사람들이 한센인들을 배척한 탓이다. 유 신부는 “한센인들은 보통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며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아픈 게 더 힘들고 무서웠을 것”이라고 했다.
진주에서도 차로 30분가량 멀리 떨어진 산골에 위치한 성심원은 국내에선 소록도 다음으로 한센인이 많이 살고 있는 복지시설이다. 과거 ‘나병’, ‘문둥병’으로 불린 한센병은 피부나 신경에 변형이 일어나는 질병이다. 유 신부가 처음 성심원에 들어왔을 당시 이곳의 한센인은 550명에 달했다고 했지만, 지난해 2월 기준으론 한센인 62명, 중증 장애인 54명이 머무는 중이다.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는 한센인이 많아지면서 지금은 중증 장애인을 함께 돌보고 있다.
스페인 게르니카에서 태어난 유 신부는 5살쯤 아버지가 듣던 라디오에서 나오던 ‘6·25전쟁’ 소식이 훗날 한국행을 결심한 계기였다고 했다. 게르니카도 내전을 겪어 전쟁 여파를 피부로 고스란히 느끼고 자란 영향이다. 신학대학을 졸업할 당시 주변에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계속해서 권유한 탓에 유 신부는 볼리비아에서 첫 선교활동을 시작했지만, 강한 의지로 1976년 한국에 입국했다.
| 유의배(77·본명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 신부가 돌보던 한센인과 중증장애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과 선물 등을 보관한 경남 산청군 성심원 주임신부실 장식장.(사진=조민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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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에 도착한 유 신부는 한센인들에게 반갑게 다가가 먼저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만지면서 인사를 건넸다. 유 신부는 “환자들은 차츰 마음의 문을 열었지만, 다른 이들 중엔 ‘신부님 한센인 많이 만졌죠’라며 악수를 안 하려고 뒷짐지고 인사하는 이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한센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고 더 이상 국내에선 한센병 환자가 나타나지 않지만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직 중국,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 등지엔 과거 소록도와 성심원의 한센인들처럼 처방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유 신부는 “한국에서 한센병이 없어졌다고 전 세계에서 없어진 게 아니다”며 “계속해서 이들을 생각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유 신부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성심원을 지키고 싶다고 했다. 성심원이 아닌 다른 곳을 가겠단 마음의 결정이 서지 않아 시간의 흐름에 맡기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지 아직 모르겠다, 건강이 안 좋아져서 말을 못 알아듣게 될 때가 올까봐 걱정”이라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 43년째 한센인을 돌보는 유의배(77·본명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 신부.(사진=조민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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