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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속에 들어간 일상...실존과 허구의 경계

김은비 기자I 2021.07.12 06:00:00

예화랑 이환권 개인전
엄연히 존재하지만 허상으로 여겨지는 그림자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우유를 마시는 아이, 머리를 말리는 여성, 기지개를 켜는 남성 등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전시장으로 그대로 옮겨졌는데 어딘가 다르다. 누군가 각 인물들을 호떡처럼 납작하게 만들어 길게 늘어뜨린 것처럼, 각 인물들은 발바닥부터 시작한 평평한 판에 들어가 있다. 다름 아닌 자신의 그림자 속에 들어간 것이다. 그림자는 물체 뒤로 빛이 통과하지 못해 생기는 어두운 부분으로 실루엣만 가지고 있을 뿐 구체적인 색, 표정은 없다. 그림자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실제 물체의 허상 정도로만 여겨지는 이유다. 반면 전시장 속 그림자들은 극사실적으로 인물들의 표정과 모습을 담고 있다.

이환권 ‘무제’(2019), 플라스틱 셸락(pla shellac), 1584×615×77㎝(사진=예화랑)
이는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 예화랑에서 지난 1일부터 선보이고 있는 이환권(47) 작가의 작품들이다. 이 작가는 일상 속 사람들 모습을 길게 늘이거나 납작하게 만드는 착시를 일으키는 조각으로 유명하다. 어릴 적 ‘브라운관’ TV화면에서 인물의 비율, 모습이 실제와 다르게 조금씩 왜곡·변형되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긴장감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이를 그대로 작품 속에 가져왔다. 대표작으로 서울 덕수궁 돌담길에 있는 작품 ‘장독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장독대’는 납작하게 눌린 네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장독대처럼 푸근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 작품은 2018년부터 작업한 신작 10점으로 기존 작품과는 다르다. 사람을 늘이거나 줄이는 것에 한발 더 나아가 그림자를 주제로 현실과 비현실, 진짜와 가짜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어느날 저녁 우유를 마시는 아들의 모습 뒤로 생긴 커다란 그림자를 보면서 영감을 얻었다. 아무 의미 없는 순간적 현상인 그림자가 때론 아무리 현상의 원인을 찾으려 해도 알 수 없는 세상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는 어떤 의미를 찾고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해왔지만, 작업물에서 무엇을 찾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이번 작업의 그림자는 원인이 없다”고 소개한다.

작가는 조명 속에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는 작품부터 바닥에서 관객의 시선을 내려받는 작품, 벽에 납작이 붙어있는 작품, 계단을 층층이 타고 올라가는 작품까지 다양한 종류의 일상 속 그림자를 작가 고유의 시각으로 포착했다. 이들 그림자는 실존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든다. 빛이 시작하는 발자국에서 빛의 반대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 조각은 허구의 모습이다. 하지만 뚜렷한 색과 선을 가지고 때론 입체감을 가져 실존하는 물체들보다 더욱 생동감을 가지기도 해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임성훈 미술 평론가는 “이환권 작가의 조각을 보고 있으면 평소에 가졌던 가짜와 진짜에 대한 생각이 모호해지고 흔들리게 된다”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껍질, 허상처럼 여겨졌던 그림자와 같은 작품을 보며 오히려 현실에서 비롯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어쩌면 이 세상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시는 7월 31일까지.

이환권 ‘무제’(2019), 플라스틱 셸락(pla shellac), 989×906×83㎝(사진=예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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