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인가 반전인가…명화로 진격한 '아이돌'

오현주 기자I 2020.05.11 00:15:00

국내에서 4년 만에 개인전 연 ''마리킴''
가나아트센터 ''마스터피스'' 전에 26점
인형같이 큰 눈의 작가캐릭터 ''아이돌''
다빈치·클림트·고려불화…걸작에 들여
"예술에 기술 접목…훼손 아닌 오마주"

작가 마리킴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서 연 개인전 ‘마스터피스’에 내건 ‘생명의 나무’(2019) 앞에 섰다. 오스트리아 작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동명원작(1909)에 등장하는 여인의 자리에 자신의 캐릭터 ‘아이돌’을 접목한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달팽이처럼 돌돌 말린 문양이 여기저기서 번쩍한다. 나선을 따라 박아넣은 금박이 조명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다. 한눈에 봐도 알 만한 그림. 독창적인 패턴과 강렬할 색채, 찬란한 황금빛을 뒤집어쓴 관능적인 여인이 등장했으니 말이다.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생명의 나무’(1909)가 분명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거대한 나무에, 금박에, 여인은 그대로인데 ‘관능’이 빠진 거다.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나 볼 법하다는 자태를 뽐내는 여인 대신 커다란 눈의 앳된 소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으니.

#2. 아미타불 본존이 결가부좌한 채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그 아래 좌우로는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 두 협시보살이 본존을 보필하듯 서 있고. 뒷머리 쪽엔 광배가 둥글게 아우라처럼 뻗쳐 있는 모양이, 그림 한 폭에 삼존을 그린 전형적인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도’(14세기)가 맞다. 그런데 일본 도쿄 네즈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그림은 색까지 바래 얼굴조차 희미한 지경이라는데. 여기 이 그림은 역시 뭔가 이상하다. 예의 그 커다란 눈을 가진 세 여인이 한껏 치장을 하고 삼존을 흉내내듯 들어가 있으니까.

마리킴의 ‘아미타삼존도’(2019·왼쪽)와 ‘수월관음도’(2019). 14세기에 그려진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도’의 삼존과 ‘수월관음도’의 관음보살 대신 커다란 눈의 ‘아이돌’을 들였다(사진=가나아트갤러리).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시장 벽마다 큼직한 액자 속 낯익은 그림들이 걸렸다. 지구촌 유수의 미술관에 있어야 할 굵직굵직한 간판작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고 할까. 마치 세계명화전의 축소판이라고 해야 할 전경. 그런데 어디까지나 멀찍이 떨어져 봤을 때의 얘기다.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이는데. 그림마다 박혀 있는 바로 그 과장된 큰 눈과 마주치는 그 일이다.

△“유능하면 모방하고 위대하면 훔친다”

작가 마리킴(43)이 국내서 4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이름 하여 ‘마스터피스’ 전. 타이틀 그대로 전시는 명화로 시작해 명화로 끝난다. 다만 늘 봐오던 그것들과는 다른 모양인데. 작가의 독특한 캐릭터 ‘아이돌’(Eyedoll)을 명작 속 주인공(주로 여성) 자리에 과감하게 등장시킨 거다. 하나같이 ‘마리킴 아이돌’로 변신한, 그렇게 아이돌이 진격한 명화를 재구성한 작품은 26점. 회화 25점과 조각 1점을 걸고 세운 작가는 이 모두를 “원작에 대한 오마주”라고 말한다.

마리킴의 ‘오송빌르 백작부인의 초상화’(2019). 프랑스작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린 동명원작(1854) 속 여인이 ‘마리킴 아이돌’로 변신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원작을 변형했지만 작품명은 원작 그대로 삼았다. 시작은 ‘웨스턴 모텔’(1957/2019). 미국작가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그림이다.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프랑스작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오송빌르 백작부인의 초상화’(1854/2019)가 보이고, 에두아르 마네의 ‘철도에서’(1873/2019),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물뿌리개를 든 소녀’(1876/2018)도 눈에 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고야가 옷을 벗기기도, 옷을 입히기도 했던 여인 마하를 그린 ‘옷을 벗은 마하’(1797∼1800/2019), ‘옷을 입은 마하’(1803/2019)는 세트로 걸려 있고, 디에고 벨리스케스의 그 유명한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1659/2019)는 더 어려졌다.

이뿐인가. 이탈리아의 중세 걸작품도 나왔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흰 담비를 안은 여인’(1400s/2019), 산드로 보티첼리의 ‘이상적 여인의 초상’(1400s/2019) 등등. 물론 여기가 끝이 아니다. 시공을 고려 후기로 옮겨놨으니. ‘수월관음도’ ‘아미타삼존도’ ‘관음·지장보살병립도’ 등이 불화시리즈(2019)로 나섰다고 할까. ‘수월관음도’에서 좌상으로 빼낸 조각작품(2019)까지 말이다.

마리킴의 ‘옷을 벗은 마하’(2019·위)와 ‘옷을 입은 마하’(2019).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고야의 동명연작(1797∼1800 & 1803) 속 여인들도 작가의 ‘오마주’ 대상이 됐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가의 ‘아이돌’은 이미 유명하다. 2007년 한국 미술시장이 호황을 누릴 때 팝아트의 줄기로 이름을 알렸다. 그 ‘만화 같은 그림’은 2011년 아이돌그룹 2NE1 앨범표지에 등장하면서 ‘아이돌과 손잡은 아이돌’로 한 차례 더 부상했다. 그런 작가가 처음부터 ‘아이돌’을 작정하고 탄생시킨 건 아니란다.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배운 적이 없다”는 작가는 “만화를 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이 큰 캐릭터가 스타일이 됐다”고 말한다. 실제 작가는 미대에서 미술이 아닌, 공대에서 멀티미디어를 공부했단다. 컴퓨터로 애니메이션 그리는 일이 훨씬 익숙했다는 소리다.

‘공학도 출신’답게 그간 작품은 주로 ‘프린트’ 형태로 세상에 나왔다. 그랬던 것이 이번 ‘명화시리즈’에선 다른 시도를 선뵀는데. 이른바 ‘물감 덧입히기’.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고 대형 캔버스로 출력한 뒤 그 위에 다시 붓질을 한 거다. 원작의 질감을 내려했단다. 화면의 절반 이상이던 얼굴 작업에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얼굴을 바꿨지만, 얼굴만 바꿀 순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돌을 들이기 위해선 원작인물이 가진 몸의 균형·규모까지 손을 봐야 했다는 거다. 그럼에도 “비율보단 기법의 다양성에 집중하려 했다”고 한다.

마리킴의 ‘관음·지정보살병립도’(2019). 전신에 하얀색 옷을 입은 관음보살상(오른쪽)이 등장하는 고려불화로 2008년 뒤늦게 발견돼 화제를 모은 ‘관음·지정보살병립도’(연도미상)를 원작으로 삼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오마주인가 훼손인가…보는 이가 가려야

그렇다면 왜 굳이 명화에 접목했을까. 미술작품은 단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편견에 어깃장을 놓고 싶었나 보다. “사진복제시대를 지나면서 ‘원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지 않은가. 명화에도 기술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전유물처럼 꺼내보고 소유하던 명화를 대중화하고자 했다는 거다. 고려불화는 한국적인 상황의 ‘대중화’인 셈. 좀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 그 ‘걸작들’을 누구나 볼 수 있게 노출한 셈이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작품은 극과 극의 평가에 놓일 만도 하다. ‘원작 오마주’인지 ‘원작 훼손인지’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말이다. 이를 의식한 듯 작가의 반응도 조심스럽다.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피카소가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난 그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명화의 색다른 방식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 한 근거로 작가는 ‘흰 담비를 안은 여인’(2019) 속의 다빈치 사인을 가리킨다. 원작을 훼손하거나 훔치려 했다면 굳이 그 사인까지 옮겨놨겠느냐는 거다.

작가 마리킴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서 연 개인전 ‘마스터피스’에 건 ‘흰 담비를 안은 여인’(2019) 옆에 섰다. 이탈리아 중세 걸작품이라 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세기에 그린 동명원작에 자신의 캐릭터 ‘아이돌’을 접목한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말을 인용해 작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현대미술에서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아이디어를 내는 거니까.” 그 말대로 작품은 불멸의 예술성에 최신의 기술을 과감하게 얹은 상상력의 승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한다”(톨스토이)며 작가가 신봉해온 ‘미론’에선 호불호가 생길 만하다. 다른 손을 타야 아름다워지는 예술이란 점에서 반기가 들릴 여지가 충분하니까. 결국 반역인지 반전인지는 보는 이들이 가려내야 할 터. 어쨌든 미술계에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던져놨다고 할까. 전시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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