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목멱칼럼]성폭력 없는 세상, 엄격한 법 적용부터

최은영 기자I 2018.02.06 05:30:00
[김정숙 국제법률전문가협회 여성인권위원회장]1986년 대학생 노동자 권인숙은 부천서 경찰관 문귀동에게 성고문을 당했다고 공개했다. 그녀의 처절한 비명에 온 사회가 전율했지만, 경찰은 “가슴만 툭툭 쳤다”며 성고문 사실을 은폐하고 검찰은 가해자에게 기소유예라는 면죄부를 줬다. 정치권력의 폭력성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김정숙 국제법률전문가협회 여성인권위원회장.
2010년 병원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검찰 간부 안태근의 여성검사 성추행 사건이 8년 만에 피해자인 서지현 검사의 고통스런 고백으로 드러났다. 검찰조직은 지난 8년간 쉬쉬하며 범죄자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피해자에겐 도리어 인사상 불이익을 주며 이 사건을 덮었다. 폐쇄적인 검찰 권력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모든 세대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고 다음 세대에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성폭력 사건이 벌어질 때면 “변하는 게 없는 것 같다”는 한숨 섞인 탄식이 반복되지만 변한 것이 없지는 않다. 1995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성범죄를 다룬 형법 제32장의 제목이 ‘정조에 관한 죄’에서 ‘강간과 추행의 죄’라 바뀌었다. 남편의 것이 되어야 할 정조를 빼앗았기 때문에 범죄라는 인식에서 여성의 권리를 침해한 범죄라는 인식으로 변한 것이다.

성폭력은 피해 여성이 쉬쉬하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가해 남성의 범죄 행위라는 점, 여성의 의사에 반하는 신체 접촉과 언어 성폭력 역시 심각한 문제라는 점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돼지흥분제로 여성 강간을 모의한 일이 젊은 날의 추억거리가 아니라 명백한 범죄 행위라 인식되는 것 역시도 ‘당연한’ 변화는 아니었다. 여성들이 수많은 반발과 조롱에 맞서 싸우면서 만들어 온 사회적 합의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들은 극단적인 폭력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간다.

며칠 전에 발족한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위원장에 권인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이 위촉됐다. 검찰총장은 내부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8년간 서지현 검사 문제를 방치한 검찰조직이 문제 해결 능력이 있다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 여성검사들이 조직을 신뢰하고 신상에 불이익은 전혀 없을 것이라는 믿음 아래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임은정 검사가 2016년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한 검찰 간부의 성폭력 의혹을 제기하자 조희진 검사장이 폭언과 함께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는 폭로가 있었다. 이번 검찰의 진상조사단은 조희진 검사를 조사단장으로 임명했다. 경위가 석연치 않다.

검찰조직에서 성폭력에 대한 폭로가 나오고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가장 폐쇄적인 권력집단인 검찰이 자성적 성찰로 개혁될 수 있을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사법조직은 국민이 권력을 준 바 없는 조직임에도 3권 분립에 의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곳이다. 폐쇄적인 서열조직이라 개혁이 쉽지 않았던 곳에서 권력을 이용한 성폭력이 폭로되었기에 서지현 검사의 고발은 매우 중대한 트리거(방아쇠)라 하겠다.

법무부에서는 서 검사의 성추행 폭로가 8년 전에 발행한 일이라 알기 어렵다는 브리핑을 한 경위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 또한 15년차 검사가 통영지청으로 발령 난 것을 인사 불이익이 아니라는 발표도 해명해야 한다. 정확한 조사와 진상규명으로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어야 한다.

서지현 검사의 고발로 대형 화산 폭발이 일어났고, 이로써 우리 땅 밑에 거대한 용암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용암을 제거해야 하는가. 화산 분출만 막아야 하는가. 미봉책만으로는 일상의 크고 작은 위험을 막을 수 없다. 상존하는 위험은 남녀 차별의 사회·문화·정치적인 패러다임에서 기인하는 본질적인 문제다. 가장 폐쇄적인 권력 엘리트 집단에서 터져 나온 화산폭발로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여성에 대한 권력형 성폭력이 밝혀지고, 사회문화적인 의식이 성숙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중대한 시점이다. 이번 일은 남녀 차별의 사회문화적 인식을 바꾸는 중대한 터닝포인트로 삼아야 한다. 근본적인 해결은 사회적 관행에 의한 성폭력의 물질적 기반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성폭력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 그것이 불가능한 유토피아라면, 여기에 다가가기 위한 잠정적 유토피아는 바로 성폭력을 정의롭게 해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성추행 폭로 #Me Too

- '성폭행 의혹' 조재현 측 “재일교포A씨, 공갈미수로 고소” - 최율 "조재현 폭로 후 아이들에 피해갈까 두려워"..''재일교포 여배우''... - 조재현·재일교포 여배우 파문에 최율 재조명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