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의 Out of Box]수레의 수와 국력

김기훈 기자I 2012.10.26 07:00:00
[이동훈 동아제약 전무] 필자는 지난봄 중국 허난성 안양의 은허유적지에 답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수천 년 전 은나라 유적이 그대로 보존된 모습을 보고 또 갑골문자가 새겨져 있는 거북의 등껍질을 보면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중에 관심을 끈 것은 무덤에서 발굴된 수레와 순장된 마부 및 말의 흔적이었다. 수레바퀴의 크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고 매우 튼튼해 보였다. 그런 수레에 타고 전쟁에 임했다고 생각하니 지금의 현대전쟁에서의 전차전을 방불케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동시에 궁금한 점이 생겼다. 이런 수레가 우리나라의 고대사와 중세사에는 존재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벽화에서는 수레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수레는 죄인을 압송하는 장면에서만 보고 그 외의 상황에서는 별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수레는 기원전 3000여 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사용됐다고 한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관련된 유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최초의 용도는 전쟁에 사용한 전차였다고 한다. 그런 수레는 로마시대에도 사용됐고 동양에서는 고대국가 때부터 줄곧 사용됐었다. 앞서 언급한 은나라뿐만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에서 그 이후 중국의 어느 왕조이건 간에 수레는 운송의 수단으로 또 전쟁의 수단으로 사용됐다. 한 고조 유방이 전쟁에서 수레를 타고 도망을 가다가 자기 아들을 밀치는 내용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중국 서안시에 위치한 진시황의 무덤에 가면 병마용이 발견되는데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청동수레가 눈에 띈다. 지금으로 따지면 고급 승용차이거나 전쟁에서 사용되는 최신식 전차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도 귀족들이 외출용으로 사용한 수레는 차양이 달렸기도 하고 귀족 여인들이 사용하던 수레는 조그마한 방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평민들이 타고 다니던 수레는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를 이용해 수레를 끌게 하거나 직접 밀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수레가 고려말과 조선을 거치면서 그 수가 줄어들고 운송수단은 가마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원나라와 명나라시절에 고려와 조선에서 많은 수의 말과 소가 조공으로 바쳐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태조 때부터 거의 100년간 7만필에 달하는 말들이 명나라의 요구로 빼앗겼다고 한다. 고려조에는 원나라에 20회가 넘게 말과 소가 보내졌고 그 수는 수십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니 한반도에는 말과 소가 매우 부족하게 됐고 결국 조선시대에는 함부로 소를 도살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이 제정됐을 정도다. 소와 말이 부족하니 수레를 사용할 수 없게 됐고 사람들은 대안으로서 가마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레가 지나는 길이 퇴행하게 돼 조선각지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형편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결국 조선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고 만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다. 주식시장에서 거래되는 완성차 업체들의 주가수익비율(PE) 배수를 보면 한국의 자동차 제조회사의 수익대비 주가비율인 PE 배수가 유럽과 미국의 경쟁사들보다 높게 나타난다. 유럽의 자동차제조사는 10배 미만의 배수를 보이고 있고 미국 역시 금융위기 이후 낮은 배수의 주가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자동차업체만이 10배가 넘는 배수를 보이고 있다. 그만큼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경쟁력을 보이며 성장하는 한국 자동차 업체가 인정받는 높은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고려 및 조선의 중세를 거치면서 과거 고구려시대의 영화로운 수레 문화가 없어지고 가마로 대치돼 국방력 등의 쇠퇴를 가져왔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수레 전문 생산국이 돼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국력이 그만큼 발전하고 또 가능성이 있다는 방증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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