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정치인보다는 외교관으로 더 많이 기억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수석 대표에 이어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으로 활동한 이력 때문이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은 김 전 본부장을 향해 “옷만 바꿔 입은 ‘이완용’”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는 ‘국익’만 보고 협상에 임했다고 한다. 그가 협상을 주도한 한·미 FTA가 성공적인 협정이었다는 사실은 현재 미국 측이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만 보더라도 입증된다.
대구 출신으로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외무고시(8회)를 거쳐 공직에 입문했다. 캐나다 주재 참사관, 외무부 의전담당관, 미국 참사관, 외무부 의전심의관 등을 역임했고, 국제기구가 모여 있는 제네바 공사를 지냈다. 2000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지역통상국장을 맡으면서 통상업무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를 거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고위관리회의(SOM) 의장을 맡았으며, 한·미 FTA에서 통상 전문가로서의 능력을 보였다.
별명은 ‘협상의 검투사’다. 한미 FTA 협상 당시 웬디 커틀러 미국 측 대표가 “(우리는) 전생에 어떤 일을 했기에 통상협상처럼 힘든 걸 해야 하나”라고 푸념하자 “(로마) 검투사였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실제 김 전 본부장의 강인한 인상은 검투사를 연상케 하고, 직설적인 화법은 검투사의 창·칼을 떠올리게 한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산악 오토바이를 즐겨타고, 패러글라이딩, 윈드서핑, 암벽 등반, 스킨스쿠버 등을 즐긴다. 특히 1998년 제네바 공사 시절에 배운 패러글라이딩은 400여 회의 활강 기록과 함께 한번 뜨면 3~4시간씩 공중에 머무르는 선수급 실력을 갖추고 있다. 휴일엔 부인을 모터사이클 뒤에 태우고 라이딩을 즐기기도 한다.
사석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시절을 추억하며 ‘I Left My Heart in San Fransisco’를 부르는 낭만파로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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