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를 꼭 100일 남겨둔 날이었다. 지난 4일 서울 양재동 한전아트센터에서 조환익(65·사진) 한전 사장을 만났다. 그는 장대한 기골만큼이나 큼지막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2012년 12월 한전 사장으로 취임한 뒤 5년 동안 적자에 시달리던 기업을 흑자로 돌려놨다. 안정적인 전력수급으로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사태)’ 걱정도 없앤 그다. 맞잡은 손에서 자신감이 전해졌다.
“한전이 변했습니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한전 배구팀이 이기는 법을 알고나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직원들도 이제는 혁신을 위한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조금만 정성스럽게 키워나가면 세계 속에 우뚝 솟을 수 있는 ‘에너지 분야의 삼성전자(005930)’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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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사장은 25년 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보까지 올랐다. 그러다가 돌연 사표를 내고 공직을 떠났다. 중간에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차관으로 불려가기도 했지만, 현 산업기술진흥원의 전신인 산업기술재단부터 수출보험공사(현 무역보험공사), 코트라, 그리고 지금의 한전까지, 공공기관 수장만 네 번을 맡았다. 그래서 ‘직업이 공기업 사장’이라는 소릴 듣는다.
남들은 한 번 하기도 어려운 기관장을 네 번이나 했으니 부러움을 살 만도 하다. 그러나 조 사장은 손을 저었다. 그가 기관장으로 갈 때면 해당 공공기관이 늘 최악의 상태였다는 것이다.
한전도 그랬다. 조 사장은 취임 직후 △적자 탈출 및 흑자전환 △밀양 송전탑 갈등 및 전력수급 불안 해결 △신사업 창출 및 해외시장 진출 △본사의 나주 이전 △세계에너지총회(WEC) 개최 △불통 상태의 조직문화 개선 등과 같은 난제들과 직면해야 했다.
“3년 전 취임했을 때 직원들은 전혀 소통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정부와도 끊어져 있었습니다. 패배주의와 갈등이 팽배한 가운데 실적에 대한 강요만 받고 있었지요.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흑자를 내려고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휴가도 가지 못하면서 다른 분야의 성과를 빼앗고 있었습니다. 회사 전체로는 나아지는 게 전혀 없었습니다.”
조 사장은 어떻게 하면 직원들이 효과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직원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처음에 대필인 줄 알고 직원들이 외면했지만, 조 사장이 직접 쓴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재임 기간인 2년 8개월 동안 총 18통의 편지를 썼다.
“첫 편지에 ‘부하직원 휴가 잘라먹는 상사는 3대가 저주받을 것이다’라고 적었더니 저만 빼고 전부 휴가를 가더군요. 덕분에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전 직원이 합심해 2013년 여름철과 겨울철 전력수급 상황 등 여러 중요 현안들을 슬기롭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기적같은 한전의 변화..혁신도 때가 있는 법”
그렇게 한전은 변해 갔다. 조 사장 취임 첫 해인 2013년 흑자(당기순이익 2383억원)로 돌아서더니 2014년 1조398억원, 올해 상반기 1조9289억원 등 흑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달 중으로 현대자동차(005380) 그룹에 팔았던 서울 삼성동 옛 본사 부지 매각대금 10조5500억원을 모두 받고 나면 올해는 부채비율도 100% 초반 수준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조 사장 취임 당시 2만8650원(2012년 12월 17일)이었던 한전 주가도 지난 7월 31일 5만900원을 기록해 16년 만에 처음으로 종전 최고치(1999년 6월 28일 5만500원)를 넘어서더니, 지난 달 3일엔 5만2200원까지 치솟는 등 2거래일 연속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다. 조 사장은 즉시 직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18번째 편지였다.
“한전 주식을 보유한 외국인 비중이 기존 22% 수준에서 10% 포인트 이상 높아졌습니다. 한전의 미래를 본 것이지요. 세계 시장에서 한전이 제대로 평가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경축할 만한 일입니다.”
조 사장은 한전의 변화에 대해 ‘기적’ 덕분이라며 자세를 낮추면서 매년 내세웠던 경영화두의 의미를 재차 강조했다. 2013년 무신불립(無信不立: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은 ‘신뢰 회복’, 2014년 집사광익(集思廣益:생각을 모아 이익을 넓히다)은 ‘흑자전환’, 2015년 일신월이(日新月異:날이 갈수록 새로워진다)는 ‘혁신을 위한 준비’라는 것이다. 한전에 앞서 세 차례 공공기관을 운영하면서 자연스레 깨달았던 것이다. 관록이 묻어나왔다.
“처음 사장으로 취임하면 혁신의 유혹에 시달립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려고 하지요. 혁신에도 때가 있습니다. 기업이 성숙한 뒤, 즉 준비를 마친 뒤에나 가능한 것입니다. 그동안 한전을 바꿔온 것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기적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시 살렸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기회를 준 국가에 감사하고, 국가에 보탬이 됐다는 사실에 또 감사합니다.”
조 사장은 이제 한전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본사 이전을 계기로 광주전남 혁신도시에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같은 ‘빛가람 에너지밸리’를 조성해 ‘대한민국의 전력수도(電力首都), 세계적인 에너지 특화도시’를 만들겠다는 목표다.
지난 2013년 세계에너지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데 이어 다음 달엔 전력분야의 대규모 국제행사인 ‘빛가람 전력기술 박람회(BIXPO)’를 광주에서 열 계획이다. 세계 35개국 100여개의 기업에서 2000여명이 참석해 전력분야 신기술과 최신 트렌드를 공유하고 미래 전력산업 방향을 제시하는 등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할 기회를 마련한다. 전체 관람객은 약 2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전은 우리나라가 스마트그리드, 마이크로그리드, 에너지저장장치(ESS) 등과 같은 에너지신산업을 신(新)성장동력인 차세대 먹거리로 만들어 가게 하는 주역입니다. 최근 캐나다에 1300만달러 마이크로그리드 수출을 성사시켰는데, 아마 이런 것들이 4~5년 후에는 매우 의미 있는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입니다. 한전이 그동안 보여 왔던 저력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것입니다. ‘에너지 분야의 삼성전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조환익 한전 사장은 누구?
조 사장은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한양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를 각각 취득했다. 행정고시 14회로 공직에 입문해 산업자원부에서 중소기업국장, 산업정책국장, 무역투자실장, 차관보 등을 거치며 무역과 산업 분야 경험을 쌓았다.
차관보 시절인 2001년 ‘관료가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부처가 활성화하기 어렵다. 능력 있는 후배에게 길을 터주겠다’며 사직한 뒤, 한국산업기술재단 사무총장을 지내다가 2004년 차관으로 산자부에 복귀했다. 차관 생활을 마치고 2007년 수출보험공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코트라 사장을 역임했다. 지난 2012년 12월부터는 한전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처럼 조 사장이 평생 나라를 위해 일해 온 데에는 집안 내력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의 친삼촌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내무장관을 하셨던 해공 신익희 선생님이십니다. 증조부께서는 고종 황제의 시종장이셨습니다. 당시로는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 지금으로 말하자면 수석비서관이지요. 고종 황제 신임을 받아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 많은 역할을 하셨는데, 경기도 양주에 가면 ‘조 시종댁’을 구청에서 알 정도입니다. 양주에서 99칸집에 살다가 쫄딱 망해서 나왔는데, 이웃들의 말로는 식구들 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대 주셨다고 합니다. 은퇴하고 나면 관련 사료를 찾아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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