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일본의 사법제도 개혁이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
내년 4월 법조인 양성 기관으로 ‘일본형 로스쿨’인 법과대학원이 전국 72개 대학에서 일제히 문을 여는 시작으로, 시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재판원제도’의 도입이 추진되는 등 일본의 사법제도에 일대 수술이 가해지고 있다. 서방 선진국에 비해 사법부가 지나치게 폐쇄적이란 비판을 받아온 일본의 사법개혁은 장기적으론 한국 사법운영체제에 미칠 효과도 적지 않을 전망이다.
일본의 사법제도 개혁의 골격은 내각에 설치된 사법제도개혁 본부(본부장·고이즈미 준치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에서 만들었다. 지난 10년간 논의끝에 2001년 ‘사법제도개혁 추진법’이 공포된 뒤 설치된 이 기구는 법조계와 경제계 등 각계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해 각종 개혁안을 제시했다.
법률 서비스 향상과 시민의 사법참여를 가능하게 재판원 제도 도입 등 각종 법안들이 내년 정기 국회를 통과를 목표로 막바지 손질 작업이 가해지고 있다. “국민의 관점에서 이용하기 쉽고 알기 쉬운 사법제도를 지향한다”는 기본목표를 세운 일본의 사법제도 개혁은 법과대학원 설치, 재판원(裁判員) 제도 도입과 재판의 신속화 방안 등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편집자注
◆로스쿨 72곳 내년 개교
일본 대학들이 법조인력 양성을 위한 경쟁시대에 돌입했다.
문부과학성에 지난 7월 법과대학원 설치를 신청한 대학은 국립대 20곳, 공립대 2곳, 사립대 50곳으로 등 72개 대학이다. 법과대학원 전체 정원은 5950명에 이른다. 대학별로는 도쿄대와 와세다대가 300명으로 가장 많고, 나머지 대학은 많게는 250명에서부터 30명까지 선발할 예정이다. 이달말 최종 심의결과가 발표될 예정이지만, 당초 각 대학들이 신청한 내용과 큰 차이 없이 설립이 허가될 것으로 보인다.
문부과학성은 변호사의 대도시 집중을 막기 위해 ‘지역을 고려한 전국적인 적정 배치’를 시도했으나, 실제로 신청을 받아본 결과 전체의 60% 정도에 해당하는 46개교가 도쿄 중심의 수도권과 교토, 오사카 중심의 긴키(近畿)지역 등 2대 도시권에 집중됐고, 24개 현에서는 법과대학원 신청이 없었다.
법과대학원 설치는 일본 정부가 추진중인 사법개혁의 핵심이다. 현행 사법시험 제도로는 주입식 시험공부와 시험교재에만 의존한 불완전한 법조인을 배출할 수밖에 없고, 늘어나는 법률 수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반성이 법과대학원 도입의 배경이다.
◆왜 법과대학원인가?
일본의 사법제도가 문턱이 높고 폐쇄적이라는 지적을 받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본 국민들이 분쟁해결을 위해 법원을 이용하는 경우는 극히 저조한 편이다. 그래서 일본 법조계에선 ‘2할 사법’이라는 말까지 있다.
분쟁해결의 수단으로 사법제도가 이용되는 비율이 2할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가장 큰 원인은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 수가 극단적으로 적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국민이 쉽게 이용하기 쉬운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선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방안 밖에 없다.
일본 법무성 통계에 따르면 2002년 현재 법조인 1인당 국민 수는 6300여 명으로, 미국 290명, 독일 740명, 영국 710명 등에 비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4500여 명보다 낮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법조 구를 좌우하는 사법시험 합격자 수는 지난 1964년이후 1991년까지 매년 500명 선에 묶여있다가 최근 어 1000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사법시험에는 또다른 폐해도 발생했다. 학부생들이 학부 강의는 제쳐두고 시험기술을 지도하는 ‘사법시험 예비학교’에만 매달리고 있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선 전혀 새로운 법조인력을 양성하는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법조인의 수를 늘리면서도 질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나온 방안이 미국식 로스쿨을 모델로 한 법과대학원의 설립이다.
◆‘법조인 5만명 시대’를 목표로
일본의 현행 사법시험 제도는 우리의 사법시험 제도와 비슷하다. 대학 전공에 상관없이 사법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것도 우리와 같다. 사법시험은 1차시험과 2차시험, 사법연수소 수료시험으로 나뉘는데, 1차 시험은 대학에서 32학점 이상 교양학점을 취득하면 면제받을 수 있다.
사법시험 2차시험은 단답식-논문식-구술식으로 구성된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사법연수소에 들어가 1년 6개월의 연수를 받은 뒤 판사-검사-변호사로 나뉘어 사회로 진출하도록 돼 있다. 지난 14일 2003년도 사법시험 2차 시험 합격자 1170명의 명단이 발표됐다. 합격율은 2.58%에 불과해 과거 5년간 최저를 기록했다.
이와 같은 비생산적인 법조인 충원방식은 법과대학원이 등장하면서 근본부터 달라지게 된다.
오는 2006년 첫 졸업생이 배출되는 법과대학원의 입학 자격은 학부의 다양한 전공자에게 개방된다. 입학시험에 앞서 적성시험을 치르도록 돼 있다. 적성시험은 법률과목이 아니라, 판단력과 독해력 등 법률가의 자격을 묻는 내용이다.
법과대학원의 수업 연한은 법학 전공자는 2년, 법학비전공자는 3년으로 나눴다. 이 과정을 수료한 학생에게는 5년이내에 3회에 한해, 새로 도입된 사법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 법과대학원은 대학교육을 정상화시키고 동시에 이론교육과 함께 실무교육을 강화해 우수한 자질을 갖춘 법률가를 배출한다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따라서 교육내용도 기초과목에서부터 법률사무소의 실습, 모의재판까지 빡빡하게 짜여지고, 현직 판사, 검사 등 실무자들이 강사로 나선다. 현재 1000명선인 합격자 수를 2010년까지 3,000명으로 늘릴 예정이고, 법과대학원 졸업자의 70~80% 정도를 합격시킨다는 구상이다. 2010년까지 현행 사법시험을 병행 실시한다. 이렇게 되면 현재 2만여명 수준인 법조인 숫자가 2018년에는 5만명 규모에 이르게 된다.
◆72개 법과대학원에 10대1 입시 경쟁율 예상
내년 입학시험을 앞둔 각 법과대학원들은 우수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벌써부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 대학에서는 다른 대학 유력교수를 거금을 주고 끌어오는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와세다(早稻田)대학와 릿쿄(立敎)대학의 법학대학원은 성적이 우수한 학부 3학년생의 ‘월반 입학’을 인정하는 문제를 검토중이다. 2006년부터 새로 도입되는 사법시험에 합격자 숫자가 많아야 그만큼 위상이 높아지고 학생 모집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커리큘럼 경쟁도 치열하다. 돗쿄( 協)대학은 교수진들이 수업 후에 1시간 정도 남아서 실질지도 시간을 늘리고, 성적 부진자에게는 퇴학을 권고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메이지(明治)대학과 호세이(法政)대학은 보조강사를 채용해 학생의 예습 지도와 첨삭 지도를 맡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류고쿠(龍谷)대학의 경우, 사법시험 예비학교인 이토주쿠(伊藤塾)에서 학생 지도 노하우를 제공받기로 협정을 맺었다. 시험 테크닉만 중시하는 예비학교와 협정을 맺은 데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지만, 학교 관계자들은 “법학대학원 학생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법학대학원 입시에 앞서 지난 8월3일, 8월31일 2차례 적성시험이 실시됐다. 일본 변호사연맹과 대학입시센터 등 2곳에서 주관했는데, 법과 대학원 지망자는 둘 중 한 곳에서 적성시험을 치러야 입학시험 자격이 주어진다. 각 대학은 적성시험 결과를 예비선발에 사용하든지, 입학시험과 합쳐 합격·불합격 판정에 이용한다.
두 차례의 적성시험에는 4만6699명이 응시했고, 시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을 위해 이달 말 치를 예정인 추가시험 응시자 8049명을 합치면 모두 5만4749명이 본 입시를 치를 것으로 보인다. 전국 72개 법과대학원의 전체 정원이 5950명인 것을 감안하면 입시 경쟁율은 10대 1 정도가 될 전망. 하지만 일부 인기 법학대학원에 수험생이 몰릴 경우 일부 지방대학에선 미달 사태가 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원 30명을 선발하는 시마네(島根)대학의 경우, 이 지역의 ‘변호사 태부족 현상’을 막기 위해 법과대학원이 설치됐다. 시마네현내의 변호사 숫자가 24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적다. 지역민들에게 만족스러운 법률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선 변호사 숫자가 60명은 돼야 한다고 한다.
시마네 대학이 법과대학원 설립하게 된 데는 지역 경제계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동해에 인접한 지역인 만큼 중국, 한국과 경제교류 확대 등을 통해 오랫동안 지속된 경기 침체를 타개하려는 시마네현의 경제 단체들이 인접한 돗토리(鳥取)현의 경제단체들과 함께 ‘법과대학원 설치 촉진기성동맹’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의 취지는 국제거래와 지적재산권 문제 등에 정통한 법률가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시마네대 법문학부 미야케(三宅孝之)교수는 “지역문제를 교재로 만들어서 관심을 높이면서 변호사들의 지방정착을 유도할 것”이라면서 “새 사법시험의 합격자중 매년 5명씩만 그대로 지역에 남아줘도, 10년이 지나면 시마네 돗토리 현의 변호사 숫자가 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직장인들을 유치하기 위해 설립된 경우도 있다. 아오모리(靑林)대학이 도쿄에 설립할 예정인 ‘도쿄법과대학원’은 야간 강의를 개설할 예정이다. 평일에는 오후 6시부터 10시20분까지 수업을 진행하는데, 직장 사정때문에 1교시 수업에 참석하기 힘든 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필수과목은 오후 7시반부터 시작되는 2교시에 배정하기로 했다.
부족한 수업시간의 메우기 위해, 토·일요일은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5시20분까지 특별강의가 실시하고, 봄 휴가나 여름 휴가 때는 일주간 가량 합숙을 하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법률공부에만 전념토록 함으로써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학교법인 ‘사토사카에(佐藤榮)학원’이 도쿄 제2변호사회와 제휴해 개교할 예정인 ‘오오미야 법과대학원대학’은 주·야간반이 모두 개설돼 있지만, 야간과 토요일 수업만 이수해도 3년만에 수료할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조정했다. 이 대학원에서 내년도 수험관련 서류를 받아가는 사람은 대부분 직장인들이라고 학교 관계자는 밝혔다.
◆합격률 저하, 서열화 문제점 지적도
일본 정부는 개혁안을 “사법시험이라는 1회적인 점(點)만에 의한 선발에서 벗어나 법학교육과 사법시험, 사법연수, 계속교육이라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프로세스’로서의 법조인 양성제도를 정비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생각처럼 될지는 일본 내부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법과대학원의 전체 정원이 5950명에 달해 전체 졸업생의 70~80%를 합격시켜 “법과대학원 졸업을 곧 법조인의 패스포트”로 만들겠다는 당초의 구상은 처음부터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커졌다. 시험 합격자 수를 3000명 정도로 확대해도 졸업생의 합격률은 50%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3년 안에 3번의 응시 기회를 준 것도 합격률을 더욱 떨어뜨리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학원의 교과과정이 너무 빡빡하고, 연간 학비가 1백 수십만엔에서 200만엔 정도로 일반 대학의 2배 이상이어서 법조인력 공급의 다양화에 기여할 일반 직장인 등의 참여가 사실상 어렵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졸업생의 사법시험 합격률이 대학의 서열을 정하는 또 다른 잣대로 부상할 것이 확실시되면서 설치 대학 간의 운명을 건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지난 8월말 도쿄에 있는 한 사법시험 예비학교가 조사해 발표한 내년도 법학대학원 입시 난이도에 따르면, 도쿄대가 1위, 다음으로 교토대, 게이오대학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서둘러 개교하다 보니 교원 부족 현상도 심각하다. 지난 8월 문부성 심사에서 72개 법학대학원중 18곳이 교수 인원을 다 채우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존의 대학 법학부 교육을 그대로 존치시켜 법학부와 법학대학원의 역할 분담을 애매하게 하는 바람에 오히려 사법시험 기간만 더 늘리는 결과가 되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홋카이도 대학의 야마구치 지로(山口二郞)교수는 “미국에는 대학 법학부가 없다. 다양한 학부 출신들이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 자격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학부와 대학원은 각각 명확한 이념을 갖고 독자적인 교육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 만큼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법조인이 된다. 미국의 사법시험은 경쟁시험이 아니나 자격시험이고, 법조자격자는 실무의 세계에서 경쟁을 통해 평가 받고 도태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일본과는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도쿄=정권현 특파원 khjung@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