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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코로나19 대응과 관련된 백악관 브리핑에서 연방준비제도(Fed)의 파격적인 1%포인트 금리 인하에 대해 “큰 걸음”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러나 같은 시각 미국 주식 선물은 곤두박질쳤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선물 지수는 가격 변동 제한폭인 5%까지 떨어지면서 서킷브레이커(거래 일시정지)가 발동됐다. 아시아 주식시장도 일제히 하락 마감했다. 연준의 파격적인 금리인하와 7000억달러를 쏟아붇는 양적완화(QE)에도 불구, 시장이 차갑게 반응한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의 위기가 통화정책으로 해결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시장의 눈은 트럼프 대통령의 입을 향해있다.
돈맥경화 현상에 화들짝 놀란 연준
연준의 파격적인 금리 인하가 시장을 놀라게 한 것은 맞다. 그러나 시장이 놀란 이유는 금리 인하폭이 아닌 시점이다. 연준이 금리를 내리기 전부터 이미 시장은 1%포인트의 금리 인하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연방기금 금리선물 시장은 연준이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내릴 확률을 32.1%로, 1%포인트 내릴 확률을 67.9%로 반영했다.
양적완화(QE) 재개도 예정된 수순이다. 코로나19와 유가 전쟁으로 시장이 요동치자 연준은 단계적으로 개입 수준을 높였다.
11일에는 하루짜리(오버나이트) 환매조건부채권(Repo·레포) 한도를 1500억달러에서 1750억달러로 확대하고, 12일에는 3개월과 1개월짜리 레포 시장도 운영하기로 했다. 또 국채 매입대상을 단기물 국채(Treasury Bill)에서 물가연동채권(TIPs) 등으로 확대했다. 14일에는 30년 만기 국채를 매입한다고 밝혔다. QE라고 선언하지 않았을 뿐, 양적완화에 준하는 유동성 공급을 계속해온 것이다.
다만 시장이 예상한 연준의 발표 시점은 오는 18~19일 예정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였다. FOMC 회의를 불과 사흘 앞둔 시점에서 연준이 일요일 오후 긴급 회의를 열고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 못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연준이 최근 금융시장의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 선제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코로나19로 공급과 수요가 모두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유가 급락으로 미국 셰일가스 업체들의 수익성이 악화하자 금융시장에서는 현금(달러)을 쌓아놓으려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돈맥경화’ 현상이 심화했다. 기업의 자금난이 심해지면 금융위기로도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연준이 금리인하 시점을 앞당겼다는 분석이다.
연준은 국채와 모기지채권을 매입해 7000억달러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한다. 은행 대상의 할인 창구에서 긴급 대출금리를 1.5%포인트 내려 연 0.25%로 낮추고 대출기간도 90일로 늘렸다. 수천 개의 은행에 대한 지급준비금 요구비율도 ‘0’으로 낮췄다.
연준이 저금리로 돈을 대주고 건전성 규제도 완화할 테니 은행은 기업에게 돈을 빌려주라고 등을 떠민 셈이다. JP모건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미국 주요 은행들도 자사주 매입을 중단하고, 금융시장 유지라는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방수’ 역할일 뿐이다.
피터 부크버 블리클리 어드바이저리 그룹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미국 CNBC와의 인터뷰에서 연준의 부양책에도 시장이 냉랭하게 반응한 것에 대해 “연준은 돈다발 바주카포를 쐈지만 돈다발로는 바이러스를 치료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연준은 역시 이번 금리인하와 양적완화가 동원 가능한 가장 강력한 카드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도 시장의 실망을 부추겼다. 연준의 성명 발표 이후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마이너스금리에 대해서는 “우리 경제 여건에는 확실히 적절하지 않다”고 일축했고 회사채·기업어음(CP)에 대해서는 “법적인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연준이 회사채와 CP를 매입해 기업들의 자금난을 해소하고 ‘줄도산’ 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시장의 요구에 고개를 가로저은 셈이다.
이제는 정치의 영역…“중앙은행 의존말라”
2006~2009년 연방준비은행 총재를 랜달 크로즈너 시카고 교수는 CNBC에 “연준은 시장에 유동성을 제공할 수 있지만, 공급망의 혼란을 해소하거나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는 없다”며 “핵심은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19에 따른 사람과 물자의 이동 제한은 경제 활동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이날 미국 경제가 올 2분기 5% 하락할 것이란 충격적인 전망을 내놨다.
잔 해치어스 골드만삭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3월 하순과 4월을 통틀어 경제활동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면서 “코로나19에 따른 불안감으로 관광과 엔터테인먼트, 요식업 등에 대한 소비자 지출이 감소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그는 “글로벌 공급체인이 중단될 가능성이 크며, 이 또한 미국 경제성장률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미국 경제성장률은 기존의 1.2%에서 0.4%로 하향 조정했다.
전문가들은 이럴 때일수록 근본적인 정책 대응을 주문한다. 코로나19 사태를 하루빨리 종식하고 이에 따른 부작용을 축소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던 지난 13일, 뉴욕증시는 아이러니하게도 12년 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며 주(州) 정부 등이 500억달러 자금에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의사와 병원이 환자 치료의 유연성을 갖도록 연방 규제와 법에 대한 면제를 줄 비상 권한을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식 검역 방식인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th) 검사를 도입한다고 밝힌 것도 이때다.
코로나19 발병 초기만 하더라도 “독감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은 모습을 보였던 트럼프 대통령이 진지하게 코로나19 대응에 나서자 시장이 화답한 것이다.
모하메드 엘 에리언 알리안츠 수석 경제고문은 파이낸셜타임즈의 기고문에서 “중앙은행에 의존적인 통화정책에서 탈피해 지속가능한 경제기반을 조성해야 할 때”라며 “이런 조치가 더 빨리 시행될 수록 경제는 더 강력하게 회복되고 그 기반도 더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