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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피카소가 질투한 자코메티

최은영 기자I 2018.10.24 05:00:00
[정재형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옛날에는 자식이 그림을 잘 그리면 커서 피카소같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세계 최고의 화가는 피카소였다.

지금까지도 이 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피카소보다 더 위대한 예술가가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샤갈도 그에 못지않고 르 코르뷔지에 같은 건축가도 대단하다. 그중 한명이 이탈리아계 스위스인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다. 피카소가 질투한 유일한 예술가로 소개된다. 심지어 자코메티는 피카소를 사기꾼이라고 폄하하기까지 했다.

세상 사람들은 피카소를 최고의 화가라고 하는데 왜 자코메티는 그를 폄하했으며 피카소는 왜 자코메티를 질투할 정도로 위대하다고 평가했을까?

올 초 한국에서 있었던 자코메티 회고전에서도 분명히 느꼈지만 영화 ‘파이널 포트레이트(final Portrait)’를 보면 그 점이 보다 명확해 진다.

영화 속에는 자코메티와 작가이며 그의 모델이었던 제임스라는 사람의 관계가 나온다. 제임스는 인터뷰를 하다가 우연히 자코메티와 만나게 되고 그의 모델이 되어 그림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몇 번 만나면 완성될 줄 알았던 초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황과 마주하며 극적인 탈출을 해야만 했다. 이 기막힌 사실을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는 이 에피소드 하나 만으로 자코메티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자세로 관객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피카소가 무한확장주의자라면 자코메티는 극소주의자(미니멀리스트)이다. 자코메티는 수많은 작품을 했어도 결국 삐쩍 마른 꼬챙이 같은 인간 하나에 머문다. 게다가 그의 작품들은 모두 손바닥만큼 작다. 가장 큰 작품이 인간의 키 혹은 그 두 배 정도에 불과하다.

자코메티와 피카소의 출발점은 같다. 미술에, 사진에 밀려 더 이상 사실주의가 불가능해졌을 때 현대미술이 선택한 길은 내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외면과는 달리 내면은, 특히 인간의 내면은 쉽게 보이지 않으므로 재현하기도 쉽지 않다. 자코메티가 선택한 단 하나의 소재는 ‘인간’이었다. 그 인간의 얼굴만을 수십 년 간 묘사하면서 그는 모든 작품이 사기고 미완성이었다고 고백한다.

영화 속에는 그가 제임스의 얼굴을 다 그린 후에 다시 지우고 원점에서 또다시 그리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는 작업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미친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완성을 향해 부단히 질주하는 그의 모습은 절망에 처한 인간이 끝까지 그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드는 불굴의 태도 그 자체다. 바쁜 현대인들은 그 정신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술을 통해 겸허해졌고 자신의 지위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깨달음의 길엔 끝이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 점이 피카소를 질투하게 만든 점이다.

둘 다 명예와 부를 거머줬지만 자코메티는 그것에 머물지 않았다. 물론 피카소가 돈과 명예를 탐착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코메티만큼 훨훨 벗어버릴 정도로 자유롭거나 대범하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그 대목에서는 백남준을 떠올리게 한다. 평생 뉴욕의 한 창고 같은 집에서 살다 죽었고 그 많은 돈과 명예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파리의 한 장소에서 살다 홀연히 사라진 자코메티는 너무도 닮아있다.

지금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고 있다. 인간이 사라진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은 더욱 창의적이고 성찰적이어야 한다. 진정 인간이 단순한 물체가 아니고 창의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나도 본래 저런 인간이었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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