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그린스펀 데자뷔…이주열의 수수께끼

김정남 기자I 2017.06.26 04:10:05

중앙은행의 긴축 의지에도 장기금리는 하락세
물가 상승 전망 낮은 영향…국제유가도 내림세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22일 한은 본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한국은행 제공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그린스펀의 수수께끼(Greenspan’s conundrum).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당시 국제금융시장을 뒤덮었던 이 용어는 기준금리와 시장금리의 이례적인 괴리를 잘 보여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지난 2004년 6월부터 경기 과열에 대응해 돈줄 죄기에 돌입했다. 당시 연준 의장이 ‘세계 경제의 마에스트로(maestro)’로 불린 앨런 그린스펀이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오히려 큰 폭 하락하고 말았다. 마에스트로가 긴축의 칼을 휘둘렀는데도 채권시장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강세 랠리(채권가격 상승·채권금리 하락)를 펼친 것이다.

연준은 이후 2006년 3월까지 기준금리를 3.75%포인트(1.0%→4.75%)나 인상했지만, 국채 10년물 금리는 겨우 0.23%포인트 올랐다. 중앙은행이 단기금리를 통해 기대 인플레이션(각 경제 주체들의 향후 물가 전망)에 영향을 미치는 장기금리를 조절하려 했지만, 무위에 그친 것이다.

그린스펀 전 의장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이 수수께끼 같은 현실이 최근 반복되고 있어 주목된다.

◇중앙은행의 ‘칼’에도 반응없는 시장

25일 한국은행과 채권시장 등에 따르면 서울채권시장에서 국고채 10년물과 물가채 10년물 금리의 차이인 BEI(Break-Even Inflation)는 지난 23일 0.699%포인트를 기록했다. 0.6%포인트대로 하락한 건 지난달 30일(0.690%포인트) 이후 처음이다.

물가채는 원금이 물가와 연동해 움직이는 국채를 말한다. 예컨대 한 국고채의 원금이 10억원이고 10년 만기에 금리는 3%라고 하자. 그러면 국고채 투자자는 10년간 연 3000만원의 이자를 받게 된다. 이때 물가 수준은 바뀌기 마련이다. 명목 금액 10억원은 그대로 있되, 물가가 2% 상승한다면 원금 10억원은 10억2000만원의 가치가 되고 물가채 투자자는 이 중 3%를 이자로 받는 것이다. 물가 위험이 배제된 물가채는 국고채보다 통상 금리가 낮다.

이 때문에 국고채와 물가채의 금리 차이는 기대 인플레이션으로 볼 수 있다. BEI가 낮다는 것은 추후 물가 상승 전망이 낮다는 의미다.

최근 BEI의 하락세가 주목되는 건 이주열 한은 총재가 긴축 의지를 드러낸 직후라는 점 때문이다. 이 총재가 지난 12일 경기 회복세를 근거로 “완화적인 통화정책 정도의 조정 필요성”을 언급하며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넌지시 내비쳤지만, 채권시장의 장기금리는 반대로 하락한 것이다. 국고채 10년물 금리는 12일 당일(2.173%→2.222%)만 급등했을 뿐 이후 계속 내렸다. 가장 최근인 23일 마감 때 금리는 2.129%. 이 총재의 긴축 의지에도 시장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그린스펀의 수수께끼에 빚댄 ‘이주열의 수수께끼’라는 평가가 나올 법하다.

채권시장 한 인사는 “한은 총재가 긴축 신호를 보내면서 단기금리는 상승 조짐이지만 장기금리는 물가 상승 전망이 완화하면서 하락세”라고 평가했다. 실제 국고채 3년물 금리는 12일 이후 9거래일 중 6거래일간 상승했다.

최근 서울채권시장에서 국고채 10년물과 물가채 10년물의 금리 차이를 나타내는 BEI(Break-Even Inflation) 추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긴축을 시사한 지난 12일 이후 BEI는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출처=마켓포인트

◇‘커브 플래트닝’ 심화하는 채권시장

이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미국부터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에 나서고 있지만, 장기금리는 이와 반대로 떨어지고 있다. 23일(현지시간)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2.1451%로 연중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올렸던 지난해 12월 때 10년물 금리 수준이 2.5%대였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이번달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예상을 넘어선 매파(통화긴축 선호)적 발언을 했지만, 시장은 이와 반대로 움직였다.

상황이 이렇자 국내외 채권시장은 커브 플래트닝이 심화하고 있다. 채권수익률곡선(일드커브)은 만기 기간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수익률의 변동을 나타낸다. 단기금리가 오르고 장기금리가 내려 장·단기 금리 차이가 작아지면 곡선은 평평한 형태(커브 플래트닝)를 띤다.

그렇다면 이런 수수께끼는 왜 일어난 것일까. 시장 일각은 지금이 ‘인상 드라이브’를 걸 만한 시점인지 자체에 의문을 품고 있다. 물가 지표부터 주춤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미국의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로 지난 2월(2.7%)보다 큰 폭 하락했다. 우리나라 역시 최근 갑작스러운 국제유가 하락세에 더해 문재인정부의 공공요금 인하 방침이 더해지면 물가가 하락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국제유가가 내리면 수출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다른 시장 관계자는 “이번달 갑자기 하락한 국제유가가 반등할 수 있을지 여부부터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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