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異야기]"미쳤냐는 말 한번쯤 들어봐야 후회없는 인생이죠"

임성영 기자I 2014.07.23 07:00:00

송무석 삼강엠앤티 대표..후육강관 국산화 선구자
한번 결심하면 끝을 보는 뚝심 경영
조선기자재업체에서 해양플랜트업체로 도약
실적개선 스타트..내년부터 본격 성장

[이데일리 임성영 기자] “미쳤다는 말을 한번쯤 들어봐야 후회 없는 인생이라 하던데 맞나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습니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후육강관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미쳤느냐’며 말렸으니까요.”

경상남도 창원시 삼강엠앤티 본사에서 만난 송무석 대표(사진)는 전형적인 철강맨이었다. 송 대표가 15년 전 후육강관을 만들겠다고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후육강관을 생산하는 곳이 없었다. 조선 강국으로 떠오르던 시절이었지만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후육강관과 같은 주요 부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철강맨의 뚝심 하나로 결국 후육강관 국산화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후육강관은 두께 2센티미터(cm) 이상의 철판을 구부려 만드는 산업용 파이프로 석유·천연가스 시추·저장 시설 같은 해양플랜트나 대형 건축물 등에 쓰인다. 두꺼운 철판을 구부리는 것 자체가 어려운 기술이기 때문에 당시 국내 기술로는 제작이 불가능했다.

미국 출장 중 보게 된 책 두께보다 두꺼운 강판들이 구부러져서 파이프가 되는 후육강관 생산과정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충격도 잠시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관 제조와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었음에도 불구, 그런 생각을 한 것에 대해 송대표는 ‘운명’이라고 확신했다.

▲송무석 삼강엠앤티 대표이사
◇유통쟁이, 후육강관 선구자 된다

후육강관을 국내에 선보이기까지 10년이라는 길을 돌아와야 했다. 후육강관 사업계획서를 들고 국내 대기업을 찾아다니며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건 ‘No’라는 대답뿐이었다. 나이도 어리고 사회에 대한 경험도 부족한데다 자금이 없었던 그는 그렇게 후육강관에 대한 꿈을 잠시 접어둬야 했다. 송 대표는 “그때를 생각하면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후육강관 국산화가 10년 늦어진 건 안타깝지만 오로지 내 힘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는 건 다행”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그는 ㈜대우에서 나와 스테인리스 제품 유통업체에 입사했다. 유통업 경험은 후육강관 제조에 대한 욕구를 더욱 불태웠다. 또다시 회사를 나와 강관 생산 기술자 2~3명을 물색했고, 그들과 함께 일본의 후육강관 생산업체를 찾았다.

일본 사람들은 기술유출에 철저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공장을 공개하지 않았다. 수주하는 선주인척 수주계획서를 만들어 일본업체를 찾아 공장을 돌면서 눈으로 보고 머리에 사진을 찍었다. 그날 저녁 기술자들과 여관방에 빙 둘러앉아 각자 머릿속에 찍은 사진을 토대로 설계도면에 그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 였다.

네 사람의 머리에 있는 조각조각들이 모여 설계도면이 완성됐고, 바로 생산설비 제조에 들어갔다. 그런 그를 보고 주위에서는 손가락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제조설비를 사와서 생산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기계를 직접 만들어서 생산하겠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실패를 장담해댔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술자들과 6개월간 공장에서 밤을 새워 수만번의 시행착오 끝에 생산설비를 완성했다. 송대표는 “그때 만든 그 기계가 아직도 공장에서 돌아가고 있다”며 “삼강엠앤티 최고 효자 기계”라고 자랑했다.

◇조선기자재업체로 머물 수 없다..해양플랜트 사업 본격진출

‘후육강관의 선구자’라는 업계 내 지위, 그리고 그에 따른 경제적 보상은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그러나 송 대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 후육강관업계의 춘추전국시대가 올테고 그 시기를 먼저 대비해야 했다. 이 때 뇌리를 스쳐 간 아이디어가 바로 대형조선업체들의 전문분야인 대형구조물, 해양플랜트 사업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당시 후육강관을 직접 만들겠다고 선언했을 때 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며 “가만히 있으면 잘 살 걸 왜 무리를 하느냐고 주위에서 만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며 웃었다. 그러나 한번 결심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인 그는 해양플랜트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바로 발벗고 나섰다.

우선 해양플랜트 사업을 하려면 바다와의 접근성이 좋은 땅이 필요했다. 해안선 근처의 땅이란 땅을 다 찾아다니던 그는 2006년 현재 본사가 입지해 있는 고성군 동해면 지형을 보고 바로 매입에 나섰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고성군으로 부터 먼저 연락이 왔다. 당시 고성군은 잦은 인구 이탈로 군지위를 박탈한 위기에 처했다. 고성군은 송대표에게 거제-통영-고성을 잇는 조선해양산업 특구사업에 삼강엠앤티가 함께 해달라고 제의했다. 마침 코스닥 상장을 준비해 왔던 터라 공모자금으로 이용해 고성공장 증설에 박차를 가했다. 산을 깎고 바다를 매립해 부두를 만들었다. 총 9만평 규모로 매립지만 4만평이다. 업계에서는 현대 삼성 대우 국내 빅3 조선사를 제외한 가장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진 부두로 꼽힌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9년 8월 해양플랜트 관련 첫 수주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해양플랜트 사업 진출에 닻을 올렸다.

▲삼강엠앤티 고성 공장 전경
◇실적개선 스타트..내년과 내후년 본격 도약

지난해 말부터 송 대표는 삼강엠앤티 공장 내부에 지은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난해 적자전환한 것과 관련, 심기일전하는 모습을 대표이사 스스로 보여줘 직원들의 사기를 복돋우기 위해서다. 조선업황 부진으로 수주가 감소한 가운데 해양플랜트 사업 추진 관련 투자비용이 늘어나면서 실적이 부진했다는 회사측의 설명이다. 괜한 투자로 부채비율만 높인 게 아니냐는 뒷말도 있었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호황기를 대비해 두는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최근의 대규모 수주가 그의 결단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현재 호주 인펙스사가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에 각각 발주한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FPSO)와 부유식해양생산설비(CPF)에 연결되는 드리븐 파일 부분을 삼강엠앤티가 제작하고 있다. 이는 길이 64.5미터 지름5.5미터로 세계 최대규모의 후육관이다. 또한 말레이시아 칼리갈리사가 현대중공업에 발주한 해양플랜트 하부 자켓부분도 삼강엠앤티가 맡아 만들고 있다. 6500톤 규모로 현재 40%정도 공사가 진행됐다. 국내 중형 기자재업체가 대규모 후육강관과 해양플랜트 자켓하부를 생산하다는 건 삼강엠앤티가 최초다. 때문에 업계에서도 상당히 주목하고 있다.

▲대형 드리븐 파일
송 대표는 “어려운 수주 2개를 따냈다는 것 자체가 삼강엠앤티의 기술력을 인정 받은 것”이라며 “업계에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해외 선주들이 대형조선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계약을 해 보자는 의사를 타진하는 단계까지 왔다”고 귀띔했다.

그는 최근 부채 증가 및 실적 부진에 따른 주가 하락과 관련해선 “보유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주가를 보면 자사주 매입에 나서고 싶다”며 “그만큼 향후 실적과 성장에 자신있다”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송 대표는 “국내기업에서 한번도 생산해 보지 않은 ‘터렛(Turret)’을 생산에 성공해 삼강엠앤티를 글로벌 해양플랜트 전문업체 반열에 올려 놓는 것이 은퇴전 마지막 목표”라면서 “지금까지 그래왔듯 간절히 바라고 그만큼 노력하만 반드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삼강엠앤티는 1분기 매출액 201억원 영업이익 24억원을 달성, 실적 턴어라운드에 성공했다. 이같은 실절 호조는 하반기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해양플랜트 하부 자켓
◇송무석 대표는 ..

1955년 경상남도 거제에서 태어났다. 1974년 경남상업고등학교를 졸업 후 1980년 ㈜대우에 입사, 5년간 리비아 등 해외 파견을 통해 견문을 넓혔다. 후육강관 국산화에 대한 열망 하나로 1999년 삼강엠앤티를 설립했다. 1년 뒤 국내 최초로 후육강관 국산화에 성공했고, 2003년 100만불 수출 탑 수상을 시작으로 2008년 5000만불 수출의 탑 수상까지 매년 회사의 꾸준한 성장을 일궈온 장본인이다. 2006년엔 후육강관 국산화로 국가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국가산업포장’을 수상했으며 2008년 회사 설립 9년 만에 코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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