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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나온 이 소령의 아들은 그것이 아버지와 나누는 마지막 인사인 줄 몰랐다. 그렇지만 마치 아버지의 ‘넋’이 가까이 와 “아들아! 더 힘내고 살아야지…”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아이는 1분 가까이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옆에 도열해 있던 어머니와 친지 등 유가족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일제히 통곡했다.
검은색 양복을 차려 입고 나온 김 중령의 열 살 난 아들은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을 흘려서는 안 돼, 남자답게 굴어야지”라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리는 듯 그는 끝내 울음을 참았다. 두 대조적인 모습을 향해 일제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기자들도 일을 멈추고 울기 시작했다. 조국을 지키다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뜬 두 조종사의 영결식은 그들이 잠든 동해의 푸른 바다처럼 또 한 번 눈물바다 속에 일렁였다.
이날 영결식에는 유족·친지와 김성일 공군참모총장, 부대원 등 700여명이 참석했다. 영정들이 들어오고 두 조종사의 약력과 생전 활동이 소개되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일부 유족들은 “아직 시신도 다 수습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보내도 되는 거냐”고 가슴을 치기도 했다.
공사 동기생들은 조사(弔辭)에서 “조국의 하늘을 지키려 한 고인들은 이제 영원한 호국의 별이 됐다”면서 “남은 우리들도 먼저 간 동료의 뜻이 바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국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상길 제11전투비행단장도 “영원한 호국의 별이 되셨으니, 조국 하늘을 지키는 보라매들의 앞길을 인도해 달라”며 눈물을 훔쳤다. 이어 군 장성들과 각 기관장들, 동료 부대원들의 헌화와 분향, 그리고 3발의 조총 발사를 끝으로 영결식은 마무리됐다.
영정을 앞세운 장례차는 5000여명의 부대 동료들이 도열한 가운데 부대 정문까지 5㎞를 서서히 빠져나가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향했다.
한편 공군은 또 이날 10여점의 기체 잔해를 추가로 수거했지만 사고 원인을 결정적으로 밝혀 줄 ‘블랙박스’를 수거하지는 못했다. F-15K 블랙박스는 수심 2만피트(6000m)에서 한 달을 견딜 수 있게 돼 있다. 공군은 이날까지 수거된 총 60여점의 기체 잔해와 유류품에 대해 분석 작업을 시작했다. 공군은 앞으로도 수색작업을 계속키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