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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위대, '돌격정신'에서 '전수방어'로[김정유의 Military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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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용 기자I 2025.10.26 08:47:17

6. 일본 자위대의 작전적 사고

김정유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44기로 임관해 군 생활 대부분을 정책 부서가 아닌 야전에서 보낸 작전 전문가다.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처장, 제17보병사단장, 합동참모본부 작전부장 등을 역임하고 2021년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이 연재는 필자가 대한민국 군에 몸 담고 있는 동안 발전시키지 못했던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 부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20회에 걸쳐 미국·독일·이스라엘·일본의 작전적 사고 사례를 차례로 검토하고, 한국의 고대·현대 사례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논증할 예정이다. 국가별 작전적 사고를 비교·분석해 미래전 양상에 부합한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를 제안한다.<편집자주>
일본 자위대의 작전적 사고는 “공격하지 않되, 전쟁을 가장 정교하게 준비한 방식”으로 요약된다. 고대 야마토정권의 방위국가 전통, 메이지시대의 정신주의와 지휘술, 태평양전쟁의 파국, 그리고 전후 헌법 9조의 전수방위를 거치며 일본은 정치가 군사를 지배하는 독특한 작전술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일본군을 공격하지 못하는 군대, 자국만 방위하는 군대 정도로만 알고 있어 과연 일본군이 어떠한 작전적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고찰해 보았다.

7세기 백제 멸망 이후 일본은 신라·당의 침입을 우려해 규슈에 사키모리(防人)체제를 두었다. 이 제도는 단순한 수비가 아니라, 전국의 전력을 중앙이 통합 지휘한 초기형 작전통합체계였다. 가마쿠라 막부 이후 전투는 개인의 용맹에서 지휘와 연계한의 전술로 발전했고, 원(몽골)의 침입 격퇴는 ‘신이 지켜주는 나라’라는 국체적 방위 신화를 남겼다. 즉, 일본의 군사사고는 태생부터 ‘공격의 미학’이 아닌 ‘방위의 미학’ 위에 세워졌다.

근대의 형성, 정신의 지휘술과 결전사상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양 군사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성보다 정신을 앞세운 일본식 작전적 사고를 만들어냈다. 그 중심에는 두 인물이 있었다. 먼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다. 그는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숭배되며, ‘충성·희생·명예’로 대표되는 대화혼(大和魂, 야마토다마시, 일본식 전사의 정신이념)을 군인의 절대 덕목으로 정립했다. 노기의 군사관은 기술이나 지휘술이 아니라, ‘국체를 위해 죽을 각오’를 군의 본질로 본 것이었다. 그의 사고는 후대 일본군에 깊이 각인되어 ‘돌격정신’(突?精神)’과 ‘옥쇄’(玉?)의 토양이 된다.

반면 나가오카 가에이(長岡外史)는 “정신이 전쟁의 원동력이지만, 지휘는 과학의 산물”이라 강조하며 정신과 기술의 균형, 지휘술의 합리화를 추구했다. 그는 서양식 참모제도와 정보운용체계를 도입하면서도, “병사의 마음이 꺾이면 전쟁은 진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즉, 정신과 합리의 경계에서 균형을 시도한 과도기적 사상가였다.

이 두 인물의 사상이 결합하며, 일본군의 교리 속에는 노기의 절대적 충성과 나가오카의 지휘술이 뒤섞인 ‘정신의 지휘술’이라는 독특한 체계가 형성됐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이 사상의 효용을 입증한 듯 보였지만, 이후 일본군은 정신주의를 더욱 강화시켰고 “한 번의 결전으로 운명을 바꾼다”는 결전사상(決?思想)에 사로잡혔다. 작전은 전략의 일부가 아니라 ‘결의를 실현하는 무대’로 변했다.

태평양 전쟁과 정신주의의 폭주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작전적사고가 어떻게 붕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전쟁 초반 일본은 진주만 기습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히에도리코에(日枝取越え), 곧 ‘목숨을 던진 돌파정신’의 연장선이었다. 미드웨이 해전(1942)에서 일본군은 정보전의 실패, 지휘 혼선, 결전 신념의 오류로 주력 항모 4척을 잃었다. 작전적 유연성 대신 ‘운’과 ‘의지’가 판단을 지배했고, 이성은 정신에 압도됐다. 돌격정신과 기습정신은 더이상 승리의 원천이 아니라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신앙이 되었다.

2년 뒤 레이테만 해전(1944)에서는 잔존 함대를 “국체를 위해 옥쇄(玉?)한다”는 논리로 투입했다.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었지만, 일본 해군은 ‘대화혼’과 ‘결전정신’을 내세워 집단 자살에 가까운 해전을 감행했다. 이 두 전투는 일본식 작전사고가 정신의 과잉과 이성의 결핍 속에 자멸한 상징적 장면이었다.

태평양 전쟁 패전 후 1947년 헌법 제9조는 전쟁의 포기와 전력 불보유를 명문화했다. 그러나 냉전이 심화되자 일본은 1954년 자위대를 창설하며 ‘필요 최소한의 자위력’이라는 논리로 전수방위(專守防衛) 원칙을 확립했다. 그 본질은 △선제공격 금지 △필요최소 방위력 △문민통제의 절대성이다. 공세적 작전은 사라졌지만, 대신 지휘·통제·지속의 정밀화가 새로운 작전술의 중심이 되었다. 즉, 전쟁을 수행하는 기술이 아니라 전쟁을 억제하고 관리하는 지휘술로 진화한 것이다.

냉전 후반 일본은 통합방위구상(統合防衛構想)을 세워 육·해·공 통합작전을 제도화했다. 미군의 AirLand Battle(공지전투)과 C4ISR 교리를 일본식으로 변경하여 적용했으며, 걸프전(1990)은 ‘정치?외교?작전의 연계’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통합작전지휘의 현실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20년대 들어 일본은 우주·사이버·전자전을 포괄하는 일본형 다영역통합작전(MDO)을 추진하며, 2022년에는 헌법 해석의 범위 내에서 ‘적 기지 공격능력(counterstrike capability)’을 공식화했다. 이는 전수방위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선제적 대응, 즉 능동적 억제(Active Deterrence)로의 진화였다. 정치적으로는 방어, 작전적으로는 반격 가능한 구조가 완성된 셈이다.

한국군에게 주는 시사점

일본의 작전적 사고는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첫째, 정치적 합법성 중심으로 군사적 효율성보다 정치적 정당성이 우선한다. 둘째, 정보·지휘 중심의 작전술과 기동보다 통제, 파괴보다 억제에 초점을 맞춘다. 셋째는 동맹 종속 속의 정밀화다. 미일동맹의 제약 속에서도 작전의 세밀도를 극대화한다.

이같은 일본의 작전적 사고는 돌격정신과 기습정신으로 상징된 정신주의의 잔해 위에서 태어난 이성의 산물이다. 패전의 교훈은 명확했다. “정신으로 이성을 대체하지 말라”였다. 전후 일본은 이성을 작전의 중심에 세우고, 정치의 통제를 군사의 합리로 변환시켰다. 그 결과 전쟁을 부정하면서도 가장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하는 오늘의 일본식 전수방위다.

일본군의 작전적 사고를 고찰해 보는 동안 많은 교훈과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있었다. 우선 일본군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전투방법인 돌격전과 함대결전을 태평양 전쟁에서 그대로 적용했다. 그러나 적도 환경도 달랐던 것이다. 결국은 과거의 성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혁신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 되었다.

반면 몇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들은 우선 제약을 역량으로 바꾸는 능력을 들 수 있다. 미일동맹과 공격금지의 제약을 극복하고 정교한 통합 C2·ISR·지속운용시스템을 극도로 발전시킨 일본의 방식을 냉정히 배워야 한다. 우리도 정보우위와 신속한 판단을 위해 정보와 지휘통제의 발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둘째, 일본군의 작전계획은 항상 국가정책과 일체로 움직이는 구조로 되어있다. 군의 작전계획이 정치나 외교와 단절되어 있으면 싸움은 이겼는데 전쟁은 지는 일이 생긴다. 우리도 전략·작전·전술의 계층을 동맹·정치와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셋째, 태평양 전쟁 후 일본군이 정신주의 대신 이성을 선택하여 군을 다시 세웠듯이 한국군도 의지로 극복하는 문화로부터 탈피하여 합리적 사고체계의 군대로 혁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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