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찾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시장. 추석 연휴를 보름 가량 앞둔 시점이지만 시장 내부는 비교적 한산했다. 이곳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김 모씨는 “손님이 없으니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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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중 가장 풍요로운 추석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내수 경기가 악화하면서 서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가 추석을 앞두고 민생안정대책을 내놨지만 대체로 ‘체감하기 어렵다’라는 분위기다. 추석 장을 보려는 주부 사이에서는 이미 고점인 제수비용에 대한 불만이 높았고 상인 사이에서는 ‘대목이 사라졌다’는 한탄이 쏟아졌다.
가격조사기관 한국물가협회가 지난달 기준 전국 17개 시도 전통시장에서 28개 차례 용품 가격을 조사한 결과 추석 차례상 비용(4인 가족 기준)은 28만 7100원으로 지난해보다 9.1%나 올랐다. 10년 전 추석 차례상 비용(19만 8610원) 대비해서는 44.6%나 높은 수준이다
같은 날 인근의 원당시장도 반응은 다르지 않았다. 일산시장보다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은 많았지만 실제 구매까지 나서는 소비자는 많지 않았다. 배추를 들었다놨다 하던 주부 정 모씨는 “채소 가격이 올라도 너무 올라서 구매가 망설여진다”며 “추석을 안 쇨 수도 없고 살지 말지 너무 고민이 된다”라고 말했다.
직장인 최모 씨는 “생필품 좀 사러 왔다가 추석 전에 가격이 얼마나 될까 싶어 둘러보는 중”이라며 “명절 앞두고는 너무 가격이 비싼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올해도 그냥 단촐하게 장을 봐야할 것 같다”고 푸념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올해 배추, 무, 시금치, 상추 등 주요 채소들 가격이 지난해 대비 급등했다. 지난해 8월 30일 대비 올해 무 가격은 무려 44.4%나 올랐다. 시금치도 같은 기간 38%나 치솟았고 상추와 배추도 각각 20.3%, 12.8% 가격이 올랐다.
가격이 떨어진 식품도 있었지만 미미했다. 사과만 지난해 대비 가격이 22% 낮아졌을 뿐 한우 등심이나 삼겹살 등은 가격하락폭이 2.1%, 2.5%에 불과해 체감상 물가가 낮아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공통적인 반응이다. 삼겹살 한 근을 구매한 주부 채 모씨는 “오를 땐 깜짝 놀라게 오르다가 떨어질 땐 시늉만 하는 것 같다”고 푸념했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상인들 사이에서는 ‘명절대목이 사라졌다’는 앓는 소리가 나온다. 반찬가게를 하는 김 모씨는 “다들 차례도 안 지내려고 하는데 지내는 사람들마저도 비싸다고 씀씀이를 줄이니 이젠 정말 장사하기 힘들다”라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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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도 사정은 비슷했다. 지난달 31일 이마트(139480) 영등포점에서는 ‘주말 3일 특가’로 국내산 샤인머스캣(1.5㎏)과 하우스감귤(1.4㎏)을 각각 1만 7800원과 1만 1900원에 팔았다. 국내산 햇사과(5~8입)도 9900원에 내놓는 등 여러 채소·과일 할인행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장을 보러 나온 소비자들은 진열된 제품을 살피면서도 쉽게 장바구니에 담지 못했다.
50대 주부 이 모씨는 “할인행사를 하지만 과일과 채소는 여전히 비싸다”며 “과거 1000원에 팔던 애호박 가격이 지금은 2000원이다. 추석이 다가오니 더 비싸지는 것 같다”며 슬그머니 사과 봉지를 내려놨다. 이씨는 “사과 가격이 내려갔다고 하는데 체감은 사실 안된다”며 “이미 과일과 채소가격은 비쌌던 터라 이제는 그냥저냥 하는 수준이다. 추석이라 더 비싸지는 거 같다”고 했다.
추석을 앞두고 외식·식품부터 채소 가격까지 고공행진 하면서 대형마트에서는 ‘초저가’ 등을 내세워 고객 몰이에 나섰지만 물건을 고르는 주부들의 손길에는 신중함이 묻어났다. 정부의 추석 민생안정대책에도 소비자들은 “체감하기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통계청이 발표한 올해 2분기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가구당 월평균 식료품·비주류음료 지출은 38만 7000원으로 전년동기대비 4% 늘었다. 특히 식료품 중 과일·과일가공품 소비지출이 12.1% 증가했다. 같은 기간 채소·채소가공품 지출도 10.6% 늘었다. 이는 과일·채소 가격의 불안정으로 소비지출 명목금액이 늘어난 영향이다. 물가 변동의 영향을 제외한 식료품의 실질소비지출은 작년보다 0.9% 줄었다. 같은 가격을 지불하고 살 수 있는 식료품 양이 적어졌단 의미다.
추석대목이 사라져간다는 푸념은 마트 코너에서도 확인이 가능했다.
라면·과자 골라담기 매대는 사람들의 발길이 적잖게 이어졌다. 올해 상반기 주요 업체들이 가격을 올리면서 간식 등 부담이 커진 영향으로 8980원에 과자 10봉지, 9900원에 묶음라면 3봉지를 가져가는 방식의 판매는 쏠쏠하게 이어졌다.
반면 명절이 대목인 추석 선물세트 코너는 한산했다. 식용유, 스팸, 참치 등 ‘실속’을 내세운 세트가 가득했지만 소비자들의 지갑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판촉 사원이 “상품 보고 가시라”, “구성이 좋다” 등을 외치며 고객유인에 나섰지만 설명만 듣고 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판촉 사원은 “힘이 드는 건 예년이나 올해나 마찬가지”라며 “그래도 실속 상품이 잘 나간다”고 귀띔했다.
정부는 올해 700억원을 투입해 ‘추석 민생안정 대책’을 가동했다.
대형마트 등 유통채널에서는 정부가 가격이 높은 성수품의 할인 판매를 지원한다. 정부지원에 대형마트별 자체 할인분을 더하면 할인폭이 40~50%에 이를 것이라는 기대다. 이마트는 오는 6일부터 정부 지원 농산물 할인 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추석 기간 출하량을 늘려 물가 잡기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올해 사과, 배 등 과일은 작황이 좋은 편이어서 사과 도매가격은 10㎏에 6만9357원으로 1년 전보다 13.2% 내렸다. 농식품부는 성수품 14개 품목을 평시의 1.6배인 15만3000t 공급하고 할인 지원 사업도 추진한다.
다만 소비자들의 기대는 크지 않다. 50대 주부 정 모씨는 “지금껏 피부로 와 닿았던 정부 명절 대책이 없어서 큰 기대는 없다”며 “이번 추석 준비는 간소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인근의 롯데마트 양평점의 상황도 비슷했다. 주요 할인 제품을 보고도 머뭇거리는 주부들이 많았다. 롯데마트는 이날 ‘미션! 물가를 잡아라’로 국산 샤인머스캣과 햇꽃게, 캐나다·호주산 찜·갈비 등 육류와 채소류를 할인 판매했다. 축산 코너에서 가격표를 살펴보던 주부 최 모씨는 “막상 살만한 할인 상품은 물량이 충분하지 않아 조기품절인 경우가 많다”며 “고기류는 좀 샀는데 시금치 등 채소가 너무 올라 나물 반찬은 꿈도 못 꿀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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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구매에 특화된 대형 할인점에서도 추석 선물 수요를 잡기 위해 분주했다. 1일 방문한 이마트 트레이더스 고양점에는 즉석햄, 통조림 참치 등 가공식품 선물세트 코너를 대규모로 배치하는 등 추석 선물 수요 잡기에 나섰다.
다만 과일 선물세트 코너의 경우 아직 제대로 준비되진 않은 모습이었다. 현장에서는 사전예약 구매만 안내하고 있었다. 가격대는 사과 골드 세트의 경우 14개입에 5만 4800원, 프리미엄 배 세트는 8개입에 4만 8800원이었다. 트레이더스 고양점 관계자는 “이른 추석으로 인해 명절용 과일 출하가 늦어지면서 현장 구매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현재 과일 선물세트의 경우 사전예약 형태로만 판매 중”이라고 말했다.
삼송역 인근서 거주하는 50대의 한 주부는 “사과 등 과일 가격이 다소 안정됐다는 소식에 미리 구매하러 왔다. 올해 설보다는 과일 가격이 안정된 것 같다”며 “과일을 제외한 장바구니 물가 전반이 올라 전체적인 와닿지는 않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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