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정책이 표류하고 있다. 뼈대가 되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은 적용 기간을 넘겼으나 아직 확정도 하지 못했다. 정부는 지난 5월 전기본 실무안을 공개했다. 그러나 관계부처 협의에 막혀 공청회, 국회 보고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11차 전기본은 2024년부터 2038년까지 15년을 적용 대상으로 한다. 서둘러 연내 확정안이 나와도 1년 지각인 셈이다.
정부는 전기사업법에 따라 2년 주기로 전력수급계획을 짠다. 이를 통해 향후 15년에 걸친 전력 수급의 기본방향, 발전설비 계획 등을 제시한다. 그런데 앞서 10차 전기본(2022~2036년)도 기간을 1년 넘긴 작년 1월에야 확정됐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되풀이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국내 전력 사정은 정부가 이렇듯 늑장을 부려도 좋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역대급 폭염이 이어지면서 전력 총수요가 100기가와트(GW)를 넘어서는 횟수가 잦아졌다. ‘전기 먹는 하마’ 인공지능(AI) 시대에 적절한 전력 확보는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변수로 등장했다. 전기차도 일시 ‘캐즘’(수요 공백)을 겪고 있으나 배터리 충전을 위한 전기 수요는 날로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 경제의 기둥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일도 시급하다.
5월에 나온 전기본 초안은 2038년 국내 최대 전력수요가 129.3GW까지 증가할 걸로 내다봤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신규 원전 3기, 소형모듈원전(SMR) 1기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담았다. 이렇게 하면 2038년 원전 비중은 35.6%로 높아진다. 원전 확대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원전은 청정에너지원이라는 장점도 있다. 동시에 초안은 신재생에너지 비중도 32.9%로 높이기로 했다. 요컨대 원전과 신재생에너지를 향후 전력 수급의 양대 축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에너지 정책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크게 흔들렸다. 정권말 탄소중립기본법이라는 ‘대못’을 박으면서 최상위 정책인 에너지기본계획도 근거를 상실했다. 그럴수록 정부가 중심을 잡고 구체적인 전력수급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시켜야 한다. 거대 야당이 지배하는 국회도 백년대계 차원에서 전력 추가 확보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