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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칼럼] 이르쿠츠크, 민족 유랑의 무대에서

허영섭 기자I 2016.09.02 06:00:00
시베리아 벌판에서도 이르쿠츠크는 역사와 문화를 자랑한다. 일대 유목민 부락은 물론 러시아, 중국, 몽골을 이어주는 교역 중심지로서 일찍부터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려졌다. 인구 70만명에 불과하지만 관광객 사이로 몰려다니는 젊은이들의 표정에서 도시의 활력을 느끼게 된다. 지난주 관훈클럽 바이칼호수 탐방단에 합류해 둘러본 도시의 인상이다.

민족의 수난시절 이곳이 독립활동 근거지였다는 사실부터 우리에게는 특별한 인연이다. 주 청사가 위치한 키로프 광장을 기점으로 뻗어 있는 레닌거리의 반필로프 소년극장이 대표적인 역사의 현장이다.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위원회가 사용하던 건물로, 1921년 고려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린 장소다.

‘스보보드니 참변’으로 와해된 독립군 잔류 병력이 포로로 끌려가 수용됐던 ‘5군단 거리’도 옛 자취를 보여준다. 일본군의 소탕작전을 피해 멀리 아무르 지역에 집결했다가 자체 내분으로 적군파의 계략에 말려든 결과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상해임시정부가 반공으로 돌아섰거니와 이때의 알력이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때 그대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역사의 시사점이다.

이 도시가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에서 4000㎞ 이상 떨어져 있으면서도 조선인들의 접근을 쉽게 허용한 것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때문이었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가 화물열차로 지나갔으며, 헤이그 밀사인 이상설·이준·이위종도 이곳을 거쳐갔다. 이범석·이범윤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유배됐던 곳이기도 하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배경이 이 일대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춘원이 이곳을 직접 방문했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제기되지만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앞서 소개한 고려공산당 출범 장소를 두고도 별도의 고증 자료가 제시된다. 하지만 이르쿠츠크라는 큰 무대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일찍이 횡단열차 레일공사가 진행될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참여했다는 흔적도 전해진다. 이르쿠츠크 구간 공사가 이뤄진 것이 1890년대 말이었으니, 나라가 어지럽던 구한말 무렵부터 이미 이 일대까지 우리 피붙이들이 떠돌고 있었다는 증거다.

한편으로는 이르쿠츠크 자체가 유랑의 도시였다. 유목민들이 말과 소, 양떼를 앞세워 떠돌아다니던 지역이다. 칭기스칸과 카자크족 정복자들도 일대를 주무르며 지나갔다. 1825년 니콜라이 1세 황제 대관식에서 반란을 일으킨 데카브리스트 청년장교들이 이곳에 유배되기도 했다. 생활환경은 고달팠어도 교류만큼은 활발했다는 얘기다.

지금도 이르쿠츠크의 도시 이미지는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날 말발굽 소리가 철도로 바뀌었고, 지금은 다시 비행기 항로가 추가됐을 뿐이다. 바이칼호수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다 북극해로 흘러드는 안가라강 물줄기를 이용해 수력발전을 일으켜 공업도시의 면모를 추가하게 된 것이 약간의 차이점이라고나 할까.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특별하달 것은 없지만 각 분야에서는 상당한 교류가 이뤄진다. 도심의 4성급 최고급 메리어트호텔 객실마다 LG텔레비전이 비치돼 있으며, 도로에는 현대·기아차가 외제차들과 나란히 달리는 모습이 상징적이다. 한국에서 중고차로 수입해간 관광버스가 ‘명진’, ‘한신’, ‘미래’라는 한글 이름을 그대로 달고 운행할 정도다.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슈퍼마켓에도 한국산 라면과 초코파이가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므로 크게 내세울 것은 아니지만 과거 우국지사들이 떠돌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회를 느끼게 된다.

오히려 바깥에서는 우리 내부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는 게 솔직한 현실이다. 핸드폰에서 쏟아지는 온갖 국내 뉴스가 어지럽기만 하다. 안가라강 벤치에 앉아 저물어가는 서쪽 하늘의 짙은 노을을 바라보며 지난날 독립운동가들의 처연했던 심사를 돌이켜본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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