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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디도의 부친은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짓기를 바랐다.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학업을 이어간 상황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이다. 크게 좌절한 디도가 찾아간 곳은 서울 성공회 대성당이었다. 마침 부대리에 있던 세실 신부가 한국교구장으로 부임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을 주시면서 키운다네.” 신부의 격려에 힘을 낸 디도는 원산상업학교로 전학하고 학업을 마쳤다.
졸업한 디도는 1942년 일인이 운영하는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취업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을 선언하자 회사의 일인 경영진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디도는 지배인으로 임명돼 사실상 회사를 인수했다. 미 군정이 들어서고 화약 수요가 늘어 회사 매출은 크게 뛰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회사는 1952년 한국화약(한화) 주식회사로 재출범했다. 디도는 회사의 인천 화약공장 한편에 성 디도 채플 공간을 마련했다. 위험한 화약 공정에 투입된 임직원의 안전과 회사의 안녕을 기원하는 예배당이다.
해방과 회사의 성장과 더불어 디도를 기쁘게 한 것은 세실 신부의 귀환이었다. 세실 신부는 대한성공회가 반일 성명을 낸 것을 계기로 1941년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세상이 바뀌고 1946년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디도는 세실 신부를 면담하면서 유년기를 회상했다. 영국인 세실 신부는 인도 총독의 아들로서 유복하게 자란 영국 귀족이었다. ‘세실 신부의 헌신이 아니었으면 부대리 마을 아이들은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디도가 1975년 천안북일고를 설립해 교육 사업에 뛰어드는 데에는 세실 신부의 영향이 지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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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는 한화가 분가할 당시 집안을 결속하는 역할을 했다. 디도가 1981년 갑작스레 숨을 거두자 한화가 장남(김승연)은 그룹을, 차남(김호연)은 빙그레를 각각 맡게 됐다. 1990년 초반, 이 과정에서 승계와 상속 문제를 두고 형제는 크게 다퉜다. 두 사람은 1995년 부친의 영정에서 눈물로 화해했는데, 디도의 부인 강태영 여사(세례명 아가다)는 이를 새기고자 가톨릭 종교시설 꽃동네에 10억 원을 헌금으로 냈다. 김 회장 3남매는 이듬해 모친의 고희를 기념해 꽃동네에 다시 1억 원을 기부했다. “내게는 잔치보다 가족의 화합이 큰 선물”이라는 게 아가다 요청이었다.
성공회는 영국 개신교 교회로서 그리스도교 가운데 가톨릭과 정교회에 이어 교세가 크다. 대한성공회는 1890년 설립돼 올해로 선교 132주년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