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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신 대신 토슈즈…'푸른 눈'의 몽룡에 홀리다

윤종성 기자I 2019.10.08 00:30:01

서양 발레에 한국적 고풍미· 해학 녹여
황태자 쉬클리야로프, ''몽룡'' 완벽 소화
두 남녀 ''첫날밤 파드되'' 애틋하고 강렬

발레 ‘춘향’의 공연 장면. ‘몽룡’(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 좌)과 ‘춘향’(강미선)이 단옷날 처음 만나 사랑의 감정을 싹 틔우고 있다(사진=유니버셜발레단)
[이데일리 윤종성 기자] 튀튀(tutu·발레 치마) 대신 하늘하늘한 한복을 차려입고 춤을 추는 발레리나들은 흩날리는 꽃잎 같다. 몸에 착 달라붙는 타이즈를 벗고 너른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발레리노들의 자태는 늠름하고 멋스럽다. 토 슈즈(toe shoes·발레 신발)를 신은 한복의 무용수들이 한 다리로 몸을 지탱해 회전하는 ‘푸에테(fouettee)’를 선보이거나 땅을 딛고 힘차게 점프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우리 전통 이야기와 서양 발레를 절묘하게 빚어낸 발레 ‘춘향’ 얘기다.

지난 4~6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유니버설발레단(UBC)의 ‘춘향’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 작품이다. 우리 고전 ‘춘향전’을 발레라는 서양 장르로 표현하면서도 한국적 고풍스러움과 서정, 해학을 놓치지 않아 보는 내내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2007년 초연 후 12년 간 대대적인 수정, 보완 작업을 거쳐 새 생명을 불어넣은 발레 ‘춘향’은 2019년 이데일리 문화대상 무용부문 ‘최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한국 창작발레의 대표 레퍼토리가 됐다.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의 수석무용수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Vladimir Shklyarov)를 ‘몽룡’에 투입한 것은 신의 한수였다. 화려한 테크닉과 섬세한 표현력, 귀공자풍의 외모까지 갖춰 ‘발레 황태자’로 불리는 쉬클리야로프는 역동적이고 화려한 움직임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열흘간의 짧은 연습으로 무대에 올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춘향’ 역을 맡은 UBC 수석 무용수 강미선의 작은 실수마저도 순발력있게 커버하며 노련하게 무대를 끌어갔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1막에서 펼쳐지는 춘향과 몽룡의 첫날 밤(초야) 파드되(pas de deux·2인무)다. 몽룡이 춘향의 겉옷을 벗기면 두 사람이 하늘거리는 속옷 차림으로 수줍게 사랑을 속삭인다. 다양한 몸놀림으로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두 청춘 남녀의 첫날 밤은 ‘만프레드 교향곡 2악장’과 잘 어우러져 애틋하고 강렬하다. 이 장면뿐 아니라 풋풋한 봄과 단오 축제에 어울리는 관현악 조곡 1번, 변학도의 부임을 풍자하는 교향곡 1번(겨울의 몽상) 3악장, 어사출두와 재회에 삽입된 교향적 환상곡 템페스트 등은 차이콥스키가 춘향을 위해 작곡한 것처럼 작품에 딱 들어맞는다.

이정우 디자이너의 한복 의상은 ‘보는 맛’을 더해준다. 트임을 넣거나 은은한 소재로 비치게 한 한복 의상은 관능미와 우아함으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무용수에게 짐이 될 수 있는 한복의 격식과 무게가 이정우의 손을 거쳐 튀튀보다 가볍게 너울댔다. 춘향의 의상은 개나리와 진달래를 닮은 노랑· 분홍을 사용해 원작에 충실하게 표현한 반면, 몽룡과 변학도, 월매 등의 의상은 세련되게 제작한 것도 눈에 띄는 부문이다.

여기에 방자와 향단의 익살스러운 몸짓, 힘 있는 남성 군무, 매혹적인 여성 군무 등 115분 러닝타임(인터미션 포함) 내내 쉼없이 볼 거리를 제공하는 공연이다. 안무와 음악, 의상, 무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소홀하지 않고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익숙한 ‘춘향전’이 소재이기에 감정이입도 수월하다. 쉬클리야로프는 기자들과 만나 “‘춘향’은 세게적으로도 굉장히 수준 높은 창작 발레”라고 평했다. ‘심청’에 이어 한국 창작발레의 저력을 보여준 ‘춘향’이 발레 본고장인 유럽 무대에 설 날도 머지 않았다.

발레 ‘춘향’의 공연 장면. ‘몽룡’(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과 ‘춘향’(강미선)이 첫날밤 파드되를 선보이고 있다(사진= 유니버설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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