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토크]① 김홍신 "정치판 더 재밌는데 소설이 먹히겠나"

오현주 기자I 2017.05.02 00:15:30

김홍신 작가·민주시민정치아카데미 원장
세월호·국정농단…잇단 사태
국가는 해결은 커녕 마비상태
미래 불안해 문학은 언감생심
새 대통령은 '상머슴'이어야
평화로운 통일로 국격 높이고
시대정신 갖춘 작가 키워야

작가 김홍신은 ‘대놓고 블랙리스트’였다. 비단 박근혜 정권에서만이 아니었다. 이전 정권에서도 그 이전 정권에서도 블랙이었다. 다들 고개를 내저었단다. ‘김홍신은 정말 어쩔 수 없다’고. “평생 블랙리스트였으니까 이번에 특별히 고생한 건 없다”며 웃는다(사진=신태현 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작가 김홍신(70). 5년 전부터 생긴 공식직함은 민주시민아카데미 원장이다. 30년이 넘은 비공식직함도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밀리언셀러 작가다.

등단 41년. 그 세월 속에 늘 호위무사처럼 그를 따라다닌 한 가지가 있다. 소설 ‘인간시장’(1981)이다. 1980년대 문학에서 김홍신과 ‘인간시장’은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스물두 살 치기 어린 법대생 장총찬을 내세워 그는 당대 사회부조리를 있는 대로 휘저어놨다. 서슬 퍼런 공안정국에 정치·경제·교육·의료·법조·언론계 등의 기득권자를 닥치는 대로 조롱하고 응징했다. 출간 즉시 10만부가 팔려나갔고, 3년 뒤 1984년에는 한국문학사상 대기록을 세운다. 100만부 돌파. 지금껏 집계한 ‘인간시장’의 총판매량은 560만부다.

문단데뷔 5년차 30대 중반의 ‘무명작가 김홍신’은 하루아침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사로 떴다. ‘인간시장’은 김 작가의 인생을 바꿔놨다. 굵직한 두 가지만 꼽아볼까. 정계진출의 기회를 잡은 것이 하나. 1995년 정치에 입문해 15대와 16대 두 번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냈다. 또 다른 하나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택. ‘인간시장’의 인세를 받아 지은 집이다. 2층 양옥으로 아담하게 올린 집에서 그는 33년째 살고 있다.

최근 그 집에서 그를 만났다. 대략 가늠해도 족히 1만여권은 넘길 장서가 그를 대신해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장서가 멀지 않아 충청남도 논산으로 옮겨질 듯하다. 홍상문화재단이 그의 문학세계를 기리기 위해 세우는 김홍신문학관이 이달 첫 삽을 뜬다.

△시국이 지운 ‘등단 40주년’

여전히 만년필 글쓰기를 고집하는 작가.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초고속 최첨단 LTE는 둘째치고 인공지능까지 집에 들여야 하는 때가 아닌가. 그런 김 작가를 앞에 두고 노트북에 연결할 전원코드를 찾는 일이 참 어이없게 여겨졌다. 언뜻 스치는 생각 한 자락. ‘인간시장’의 그때나 지금이나 뭐가 달라진 게 있다고.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요즘 글쓰기에 대해 물었다. “지난해 장편을 탈고했다. ‘사랑멀미’(가제)다. 등단 40주년에 맞춰 내놓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못했다. 정국이 이 모양인데 사랑타령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책 모양도 쑥스럽고 40주년 잔치도 용납이 안 됐다.” 지난해 가을부터 지금껏 나라를 벌집 쑤시듯 휘저어 온 국정농단사태를 말하는 것이다. 촛불집회, 대통령 파면과 구속, 조기대선까지 이어진 숨 막히는 정국. “작가 입장에선 이 와중에 소설을 내는 일도 미안하고 베스트셀러가 돼도 미안하고. 독자입장에선 소설을 사는 것도 미안하고 읽는 것도 미안하고. 문학 자체가 죄스러운 시절이 아닌가.”

△문학침체가 작가탓? 국가탓!

유추해보면 국가가 자초한 거란다. 물 먹은 종이가 이런 꼴일까. 어느 순간부터 가라앉은 한국문학의 침체가 지독했다. 지난해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이 그나마 활력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중견작가들의 신작이 나왔고 꿈쩍 않던 시장을 움직였다. 그런데 오래가진 못했다. 이번엔 시국이 발목을 잡았다. “작가 탓을 한다. 어째서 내밀하게 미래를 예견하지 못하고 치열하게 인간문제를 못 파고드느냐고. 부정은 못하겠다. 그런데 그보다는 격변기에다가 과도기까지 겹친 지금 시대의 사회현상을 봐야 한다.”

“가장 빠르고 단단한 방법은 사회가 안정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 김홍신. 그후 “시대를 증명하고 조명하고 관통하는 작가를 키우는 일에 치열해지면 더디더라도 한강 같은 작가가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국력 때문에 평가를 제대로 못 받는 작가가 너무 많지 않은가”라며(사진=신태현 기자).


이 지점에서 김 작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근래 몇 년간 세월호, 메르스, 최순실까지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특히 지난해부터 벌인 정국을 둘러싼 정치판은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지 않나.” 허구로 포장한 소설보다 리얼하고 감각적인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문학이 제대로 먹히겠느냐는 얘기다. 격변기에 심리적 안정을 찾지 못한 이들에게 책을 쥐어줘봤자라는 소리다. “취업도 안 되고 결혼도 못한다. 현재는 물론 미래도 불안하다. 정작 나서줘야 하는 국가는 마비상태고.” 국가가 나서서 책을 읽지 못하게 막는 형국이란 거다. “사회 전체가 교양지식조차 갖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국가의 잘못이 작가의 잘못보다 10배는 크다.”

그래도 방법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가장 빠르고 단단한 방법은 사회가 안정을 이루는 것”이란다. 그러곤 이내 결론이 국격에 닿았다. “시대를 증명하는 작가를 키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국격을 높여야 한다. 그러려면 통일이 필요하다. 평화적이고 따뜻한 통일. 그후엔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문학이 산다.”

△문학인·정치인으로 듀얼 인생…“난 영원한 블랙리스트”

모르는 사람이라면 작가의 오지랖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문학이 죽고 책을 안 읽는다는 얘기가 어째 통일로 튀나. 하지만 그의 과거를 지켜봤다면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 정계에 발을 들이고 8년. 그 시절 그는 ‘대단히 소신있는’ 국회의원이었다. 마치 ‘인간시장’의 장총찬 같았다고나 할까. 정치인으로 받은 각종 수상이 문학상을 넘어설 정도다. 민족과 국가를 부르짖으며 정치인으로 내달렸던 행보는 2004년 서울 종로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마감했다. 그 상실감이었나. 그는 10권짜리 대하소설 ‘대발해’를 발표하며 ‘자학’의 시절을 보냈다. “정치인에서 글쟁이로 돌아오려니 피를 토하고 영혼을 토하고 인생을 토하지 않고선 방법이 없을 거 같았다. 대안이 없었다. 나를 갉아먹는 것 말고는.”

민족사 원류를 찾는 대서사시를 써보자고 덤벼들었다. 3년간 두문불출, 하루 12시간 20장씩 원고지 1만 2000장을 썼다. 그렇게 2007년 발표한 ‘대발해’는 오른손 마비와 바꾼 것이다. 햇빛을 보지 못하고 물을 적게 마셔 햇빛알레르기에 요로결석까지 생겼다. 그의 스타일을 완성한 스카프의 비밀도 밝혀졌다. “햇빛 탓에 목에 상처가 난 뒤부터 스카프를 두르게 됐다.”

‘대발해’가 말해주듯 그는 한국인의 유전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한국인에겐 웅장하고 장엄한 DNA가 있다. 어떻게 만든 나라인데….” 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부설인 민주시민정치아카데미 원장직을 맡은 것과 무관치 않을 거다. 1년에 2기씩 수강생을 받는 아카데미를 그는 알뜰히 챙긴다. 운영도 물론이고 강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9기까지 받았으니 5년쯤 됐다. 정·관계, 경제·학계 등 각 분야 전문가, 정치꿈을 꾸는 이들을 정치사회지도자로 양성한다. ‘대한민국을 감동케 하라’가 캐치프레이즈다.”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건? ‘머슴 중 상머슴’일 것. 누리려고 하지 말 것. “최고 인력이 어디 있는지 항상 살피고 여야 가리지 말고 적진이라도 능력이 있다면 무조건 데려와야 한다. 그렇게 투입한 사람이 아마 더 잘할 거다. 보란 듯이”(사진=신태현 기자).
문학인과 정치인으로 ‘듀얼’ 인생. 순탄했을 리 없다. 덕분에 그는 ‘대놓고 블랙리스트’였다. 비단 박근혜 정권에서만이 아니었다. 이전 정권에서도 그 이전 정권에서도 블랙이었다. 다들 고개를 내저었다고 했다. ‘김홍신은 정말 어쩔 수 없다’고. “평생 블랙리스트였으니까 이번에 특별히 고생한 건 없다”며 웃는다. 하긴 도청까지 당하면서 ‘내가 정말 유리로 만든 집에 사는 구나’ 싶을 때도 있었다니.

△“대통령은 머슴 중 상머슴이어야”

바로 한 주 뒤면 새 대통령이 우리 앞에 나선다. 유독 바라는 게 많지 않겠나. “우리 대통령의 문제가 뭔지 아나. 내가 잘해서 되는 게 아니고 상대가 못해서 반대급부를 얻는 구조라는 거다. 누가 되든 이번 대통령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거다.” 당장 헌법개정부터 해야 한단다. “대통령 권한이 지나치게 집중화한 건 막아야 한다. 천하에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분권이 안 되면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총리에게 권한을 주고 국방 외교만 맡으면 된다.”

대통령은 ‘머슴 중 상머슴’이어야 한다고도 했다. “누리려고 해선 안 된다. 주요 보직은 물론이고 상하기관장에도 손대지 말아야 한다. 최고 인력이 어디 있는지 항상 살피고 여야 가리지 말고. 적진이라도 능력이 있다면 무조건 데려와야 한다. 그렇게 투입한 사람이 아마 더 잘할 거다. 보란 듯이.” 그걸 안 해서 이 사태가 벌어진 거라고.

경제든 정치든 그 분야 최고의 사람을 배치하는 일. 그렇게만 된다면 누가 대통령이든 뭐가 걱정이겠나. “국민인 우리가 할 일은 그 일을 용기있게 호기롭게 할 수 있는 후보를 가려내는 일이다.”

△김홍신문학관에 거는 평생의 테마

어느덧 40년을 넘긴 김 작가의 전환기는 김홍신문학관에서 마무리될 듯하다. 충남 논산에 1617㎡(489평) 규모로 조성할 김홍신문학관이 내년 완공을 목표로 이달 착공에 들어간다. 감회가 새로울 터다. “어느 순간 다 내려놓은 뒤 영혼이 편해졌다. 이젠 하고 싶은 말 하고, 쓰고 싶은 글 쓰고, 눈치 안 보고.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다.”

예전 공항에서도 장관급 대우를 해줬다는 ‘인간시장’이 득이기만 했겠는가. 부담은 뒤늦게 터졌다. ‘대발해’ 이후 소설이 써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그는 인간적인 위기를 겪었다. 가톨릭신자인 그가 소주에 취해 108배를 한 일은 약과다. “법륜스님과 명상을 한 적도 있다. 말이 좋아 명상이지 하루 13시간씩 가부좌를 틀고 묵언수행을 했다. 온몸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그런 중에도 깨달음이 오더란다. “면벽하고 앉아 있으니 하얀 벽 안에 든 내 인생이 다 보이더라. 힘들었던 일, 실수와 실패, 미워했던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해야만 했다고.

“어렵게 미움을 털어내니 그제야 자유가 오더라”고 그가 고집스럽게 터득한 철학을 작가인생의 결정판이 될 문학관에서 다시 보게 될까.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엔 바람도 걸린다’던 그의 평생 최고가 테마 말이다.

△작가 김홍신은…

1947년 3월 충남 공주 출생해 논산에서 성장했다. 논산 대건고교와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3년에는 동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6년 ‘현대문학’에 ‘물산’ ‘본전댁’으로 등단. 1981년 발표한 장편소설 ‘인간시장’이 대한민국 최초로 100만부를 돌파하면서 밀레니엄셀러 작가란 타이틀을 얻었다. 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6년 민주당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했고 이후 1997년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한나라당 소속이 됐다. 2004년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는 본업인 소설가로 돌아와 2007년 대하소설 ‘대발해’를 출간했다.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석좌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글쓰는 일 외에 민주시민정치아카데미 원장으로 일한다.

주요작품으로는 ‘인간시장’ ‘대발해’ 외에 ‘칼날 위의 전쟁’ ‘바람 바람 바람’ ‘내륙풍’ ‘난장판’ ‘풍객’ ‘대곡’ ‘단 한 번의 사랑’ 등의 소설과 ‘인생사용설명서’ ‘인생견문록’ ‘그게 뭐 어쨌다고?’ ‘인생을 맛있게 사는 지혜’ 등 에세이집이 있다. 한국소설문학상(1986), 소설문학작품상(1987), 자랑스런한국인 대상(2001), 한국유권자운동연합 의정활동 대상·최우수상(2002·2003), 통일문화대상(2007), 현대불교문학상(2009), 한민족대상(2009), 한국문학상(2015)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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