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코오피와 최면약'' 관람기
서울로7017~국립극단 1㎞가 공연장
이상 소설 ''날개'' 통해 생경함 전해
코로나 시대가 만든 이색 ''관극 체험''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읽어 오디오를 실행해주세요. 이어폰에서 종소리가 들리면 걷기 시작하고, 다시 종소리가 들리면 근처 의자에 앉으면 됩니다.”
국립극단 연극 ‘코오피와 최면약’을 보기 위해 지난 25일 오후 지하철 4호선 회현역 인근 서울로7017 안내소를 찾았다. 안내소에 들어가 문진표 작성과 체온 측정을 한 뒤 국립극단 직원의 설명을 들었다. 설명에 따라 스마트폰으로 오디오에 접속하고 안내소 밖을 나섰다.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된 순간이다.
| 국립극단 ‘코오피와 최면약’의 공연이 시작되는 서울역7017 안내소(사진=국립극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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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은 서울로7017 안내소에서 서계동 국립극단까지 이어지는 약 1㎞의 길이다. 길을 걸으면서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로 공연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주말답게 서울로7017은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 인파로 가득했다. 이들 사이에서 홀로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온 것은 소설가 이상의 ‘날개’. 1930년대 명동에서 경성역(현 서울역)을 정처 없이 걸었던 이상의 목소리가 90여 년이 지난 지금 같은 공간에서 재현됐다. 아스피린이라고 믿었던 최면제 아달린 6알을 씹어 먹으며 점점 몽롱해지는 이상의 목소리를 듣다보니 일상의 풍경마저 몽환적으로 바뀌었다.
서울역이 멀리 내다보이는 ‘수국전망대’에 도착하니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가상현실(VR) 장비와 마주하게 됐다. 잠시 자리에 앉아 VR 장비로 공연을 감상할 차례. 눈앞에는 방금까지 바라보던 서울역의 풍경이 보였다. 화면은 서서히 180도로 뒤집히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 위를 거꾸로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 국립극단 ‘코오피와 최면약’의 공연 중 ‘수국전망대’ 모습. 이곳에 도착한 관객은 직원 안내에 따라 VR 장비를 착용하고 공연을 감상하게 된다. (사진=국립극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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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서울로7017을 걸으면서 멀리 전광판 속 영상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산책로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앉아 오디오를 들었다. 고독한 기분도 잠시, 역사적 사건을 시간 순서가 뒤섞인채로 들려주는 오디오 독백이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게 했다. 마침내 도착한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텅 빈 극장 객석 위에는 또 다시 VR 장비가 놓여 있었다. 서울로7017을 걷는 동안 알지 못했던 숨겨진 진실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과 영상이 공연계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지금, ‘코오피와 최면약’은 그야말로 색다른 ‘관극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번 공연은 국립극단이 주변 문화시설과 연계한 프로젝트로 기획됐다. 국립극단은 그동안 장소 특정 퍼포먼스를 선보여온 서현석 작가에게 서울로7017과 서계동 국립극단을 활용한 공연 제작은 제안했다. 이에 서 작가는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 장소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상의 소설 ‘날개’를 모티브로 정해 이번 공연을 완성시켰다.
공연은 회당 1명만 관람 가능해 그야말로 ‘거리두기’라는 말이 어울린다. 평일엔 하루 16명, 주말엔 하루 22명만 관람할 수 있다. 다만 이상의 작품을 모티브로 삼은 만큼 공연 자체가 난해한 점은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이상이 아닌 다른 작가를 모티브로 했다면 어떤 체험이 됐을지 궁금해진다. 공연은 오는 10월 3일까지.
| 국립극단 ‘코오피와 최면약’의 공연 마지막 무대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텅빈 극장에서 관객은 홀로 VR 장비를 착용하고 공연을 감상하게 된다. (사진=국립극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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