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그림팔자가 있고 화가는 화가팔자가 있고"

오현주 기자I 2019.07.29 00:45:00

가나아트 노은님 개인전 ''힘과 시''
파독간호사로 일하다 재능 들켜 화가로
獨함부르크조형예술대서 교수로 20년
강렬·단순한 색채, 정돈되지 않은 붓질
평창·한남 통틀어 회화 90점 조각 20점

작가 노은님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건 자신의 작품 ‘어느 봄날’(2019) 옆에 섰다. 가로 225㎝ 세로 161㎝, 150호짜리 대작이다. 원근파괴 구도파괴, 그저 단출한 붓선으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린다. 마치 어린아이처럼(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처음 그린 그림은 초상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린 초상화. “아버지가 어머니 그림을 가지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렸다. 재료 사놓고 한 세 점쯤 그렸는데 눈이 아파서 더는 안 되겠더라. 그래서 초상화는 접고 남은 재료로 이리저리 그린 게 지금의 그림이다.”

그러다가 어려운 집안살림을 돕자고 간호보조원으로 독일 함부르크에 가게 됐다. 1970년 일이다. 간호사로 일하고 남은 시간에 그림을 그렸다는데 우연찮게 간호장 눈에 띈 건 ‘운명’이었다. 병원에서 전시를 열어줬고 그 소식이 함부르크 지역신문 1면을 장식했다. 마침 함부르크 국립미술대 한스 티만 교수의 눈에 든 것 역시 운명이었을까. “병원에서 소개를 해줬다. 이 여자는 병원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고. 추천서를 써준 건 티만 교수다. ‘무조건 붙이고 지원하라’고.”

그렇게 함부르크 국립미술대에 입학한 게 1973년. 그 뒤론 거칠 게 없었다. 1979년 졸업하고 작가생활을 하던 중 1994년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에 정교수로 임용돼 이후 20년 동안 후학 가르치는 일도 했으니. 간호사 3년 계약기간이 끝났지만 그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첫 그림을 판 일은 잊을 수가 없다. “나이 지긋한 병원관리자가 찾아와 묻더라. ‘그림을 다 어디에 두느냐.’ ‘침대 밑에 둔다.’ ‘내가 한 점을 사도 되겠나.’ 그러면서 2000마르크를 준다더라. 당시 월급이 400마르크였다.” 그런데 기분이 별로였단다. “그림을 팔았다는 게 남은 것 훔친 듯한 느낌이더라. 돈을 바꿔서 한국 아버지에게 보냈다, 동생들에게 쓰라고.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단 한 번도 화가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이 화가는 그렇게 화가가 됐다. 운명처럼, 아니 팔자처럼.

노은님의 ‘피크닉’(2019). 정돈되지 않은 붓질로 단순하게 선을 뽑고, 원초적인 검은 색으로 면을 채우거나 허연 여백을 그대로 두는 작품들. 소풍 나온 이들이 누군진 분명치 않다. 작가의 그림 안에선 사람도 동물 같고 동물도 사람 같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가 노은님(73). 그이에겐 ‘파독 간호사 출신 화가’란 타이틀이 평생 따라다닌다. 스물셋 빛나는 나이에 간호사 캡을 쓰고 독일로 갔다가 화가로 성공했으니. 간호사보다 스무 배쯤 많은 세월을 화가로 보냈건만 한국행에는 여전히 ‘파독 간호사’ ‘금의환향’이란 수식어가 이름을 앞섰다.

그렇게 반세기. 노 작가가 국내서 4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와 용산구 한남동 가나아트한남을 통틀어 연 ‘힘과 시’ 전이다. ‘생명의 시초’(1984), ‘큰 바다’(1984), ‘뛰는 동물’(1984), ‘물고기 잡기’(1988) 등 1980년대부터 ‘달과 함께’ (2019), ‘어느 봄날’(2019), ‘즐거운 친구들’(2019), ‘피크닉’(2019) 등 최근작까지 대작 위주의 회화작품 30여점은 가나아트센터에 걸었다. 아기자기한 소품은 가나아트한남에서 반긴다. ‘소녀’(1995), ‘물고기’(2000) 등 테라코타 20여점과 ‘사랑하는 사람들’(2017), ‘봄의 시작’(2019), ‘고래새끼’(2019) 등 60여점이다. 사실상 회고전이다. 가장 오래된 ‘불 속에서’(1982)부터 얼마 전 작업한 작품까지 대거 나왔으니 얼추 50년 예술세계 중 37년여를 되돌아본 셈이다.

노은님의 ‘달과 함께’(2019). 때론 일필휘지 같은 붓선만 살리지만 때론 푸르고 노란 색색을 입혀 화면을 풍성하게 만든다(사진=가나아트).


△파독 간호사서 세계적 화가로…장난같은 운명

정돈되지 않은 거친 붓질로 단순하게 선을 뽑고, 원초적인 검은 색으로 면을 채우거나 허연 여백을 그대로 둔다. 때론 일필휘지 같은 붓선만 살리고 때론 푸르고 노란 색색을 입힌다. 물고기를 많이 그려 ‘물고기작가’라고도 했다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고양이·고래·사슴, 나뭇잎·나무·꽃, 구름·밤·물 등 소재는 다양하다. ‘콜래보’도 있다. ‘나무가 된 사슴’(2019), ‘개와 닭’(2007)처럼. 사람이든 동물이든 최소한의 형상만 남기는 건 철학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그이의 그림 안에선 사람도 동물 같고 동물도 사람 같다. 무심하고 순진하며, 단출하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생각대로 옮긴 동화 같은 거다.

노은님의 ‘사랑하는 사람들’(2019). 분명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생김새는 차라리 펭귄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최소한의 형상만 남긴 작가의 그림 안에선 사람도 동물 같고 동물도 사람 같다(사진=가나아트).


최근 전시 개막을 앞두고 가나아트센터서 만난 노 작가는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풀어놨다. “독일서 산 게 49년째지만 역마살 인생 맞다. 세상을 한 바퀴쯤 돈 거 같다. 그러다 보니 보이더라.” 번 돈을 세상구경 다니는 데 다 썼을 거란 얘기를 하는 거다. 유독 관심이 많은 건 ‘크리에이티브’한 거란다. 원시적인 냄새가 풍풍 풍기는 그것. “간단해서 좋고 편해서 좋고.” 아프리카를 네 번이나 다녀온 것도 그런 이유다. 신나게 다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란다. “사람 사는 거나 동식물이 사는 거나 모두 뭉뚱그려 돌아가는 게 세상이 아닐까.” 그이의 작품에 섞여 등장하는 사람이니 동물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소리다.

치밀한 계획, 이런 거 하곤 거리가 멀다. 계획 없이 돌아다닌 게 ‘지구 한 바퀴’라지 않나. “결국 처음 느끼고 본 것이 짬뽕이 돼 그림에 나타나는데. 어떤 때는 내가 뭘 그렸는지도 모른다. 한 점도 내가 그리겠다고 작정한 건 없다.” 그래선가. 아침에 일어나 점 하나 찍어도 그날 하루는 충분하다고 했다. 물론 턱 막히기도 한다. 그럴 땐 낚시꾼과 자신을 비교한다고 했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면 어떤 날은 많이, 어떤 날은 적게 잡지 않나. 화가도 마찬가지다.”

노은님의 테라코타 조각작품 ‘물고기’(2000). 유독 물고기를 많이 그려 ‘물고기작가’라 불리기도 했다지만 소품 위주의 조각도 예외는 아니다. 무심하고 순진하며, 단출하고 천진난만한 것까지 회화와 다를 바 없다(사진=가나아트).


△“점 하나만 찍어도 그날 하루는 충분해”

오는 11월에는 작가 작업실이 있는 독일 남서부 미헬슈타트시립미술관에 그이의 작품으로만 채운 영구 전시실을 연다. 이 대단한 일을 앞두고도 노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화가로 특별하게 살았다는 생각은 안 한다. 팔자였을 거다. 그림도 그림 팔자가 있고 옷도 옷 팔자가 있고. 인연이 있어 다 만나는 거 아닌가. 그래서 힘써 쫓아다니지 않는다.”

어찌 보면 운명론자 같다. “하늘에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힘이 모였다가 화산이 되고 땅이 갈라지고 물이 생기고.” 결국 화가는 그것을 화폭에 옮겨놓는 것뿐이란 얘기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 노은님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건 ‘나뭇잎배’(1987) 앞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둥둥 떠가는 나뭇잎배에 누가 올라탔는지는 알 수 없다. 초반엔 유치원생이 그린 듯한 이런 단순한 그림이 창피했던 적도 많았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지금은 서울여대 석좌교수로 3년째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석좌교수가 뭐하는 거냐고 물었다. ‘수업 오래 안 해도 되는 거다’고 하더라. 그래서 하기로 했다.” 그 덕에 그이의 한국행이 잦아졌다. “나는 복이 많다. 인복이다. 가는 데마다 누군가를 만나고 그런 만남이 편하다. 그렇게 여기까지 온 거다. 특별히 한 것도 없다. 늘 도움을 받고 인도해준 사람을 만나서 이룬 거다. 그래서 난 부자다.”

과연 인복뿐이겠나. 세상에서 가장 불공평한 것 한 가지가 탤런트 아닌가. 그건 싸매고 묻어도 어쩔 수 없이 발현하는 법이다. 억지로 화려한 색을 입히지도, 좋은 종이로 포장하지 않아도. 정작 작가는 “내가 어디서 무슨 짓을 했는지 나도 모른다”(2003년 메모)고 하지 않나. 전시는 가나아트센터에선 8월 18일, 가나아트한남에선 8월 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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