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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이 유선방송 사업을 시작한 때는 1965년. 병원, 은행, 사무실 등 업무 공간에서 다방, 캬바레 등 휴게 공간까지 유선을 통해 음악을 전해주는 서비스였다.
당시 한국은 유선 서비스에 있어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이 회장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음악 유선 방송 기술을 국내에 도입했다. 처음에는 명동, 1972년부터는 부산에서 본격적인 음악 유선 사업을 했다.
이 회장은 “음악 유선 방송은 업소들의 경비 절감에 큰 기여를 했다”며 “최신 유행곡 또는 클래식을 저렴한 가격에 끊임없이 이용 가능해 인기가 높았다”고 회상했다.
예컨대 1960년대 LP 레코드판 하나 가격이 2000~3000원 정도였다. 반면 음악 유선 6채널의 한달 사용료가 3000원이었다.
유선으로 영상을 전송하기 시작한 건 1983년이었다. 이 회장은 “유선방송은 지상파 난시청 해소에 일조했고 TV 수상기 판매도 촉진했다”며 “1986년 중계유선방송법이 시행되면서 전송되는 콘텐츠의 질이 높아지면서 가입자도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접할 수 있는 영상 매체가 지상파 TV가 유일했던 시절, 유선 방송의 역할은 컸다. 이 회장은 “TV가 잘 나오면 고맙다고 곶감이며 밤이며 과일을 쥐어 주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전 직원이 나서 맨손으로 망을 포설하고 전신주에 올랐던 점도 이같은 보람 때문”이라고 전했다.
최근들어 케이블TV에 대한 위기론이 심심치않게 나오고 있다. 20년전 뉴미디어였던 케이블TV는 IPTV, OTT(Over the Top), 모바일TV의대중화로 올드미디어가 됐다.
케이블의 산 역사인 그는 “전체 유료 방송 시장의 변화에 대해 민감하게 대처하는 게 필요하지만 케이블 본연의 자세인 지역과 시청자에 대해 더욱 더 민감해야 한다”며 “단순히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주위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지금 중요한 덕목”이라고 지적했다.
CMB는 음악 유선 방송을 시작한 1965년 이후 50돌을 맞았다. 음악 유선 서비스로 시작해 방송 중계, 유선방송사업자로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며 성장한 것이다.
이 회장은 “무한 경쟁 속에서 발전과 성장이라는 가치만을 쫓아온 지난 세월은 일방적인 전달의 시대였다”며 “CMB 구성원들이 서로 생각을 나누고 고객들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갈 계획”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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