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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무대 밖으로 나오다

이윤정 기자I 2014.03.31 07:06:00

''남산 도큐멘타''…산책로서 작품 설명
''투표는 진행중입니다''…관객을 배우로
일상적 공간도 연극적 공간으로 활용
"관객들에 반성적 질문 던지게 해"

연극 ‘남산 도큐멘타’ 프로그램 중 ‘유령산책’의 한 장면. 관객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배우 김다흰(오른쪽)이 ‘박카스걸’ 역할을 하는 장수진에게 말을 걸고 있다(사진=남산예술센터).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전시회에서 본 적은 있지만 산책하면서 설명듣는 연극은 처음이에요.” 지난 22일 서울 예장동 남산예술센터. 연극 ‘남산 도큐멘타’의 한 프로그램인 ‘유령산책’에 참여한 회사원 고아라(33) 씨는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날 산책에 참여한 사람은 19명. 평소보다 4~5명가량 많은 인원이다.

한 배우가 산책로를 돌며 설명을 하는 동안 곳곳엔 다른 배우들이 기다리고 있다. 일명 ‘박카스걸’이라 불리는 장수진은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자양강장제 한 병을 7만 5000원에 판매하고 있어요”라며 황당한 웃음을 선사하기도. 또 다른 장소에선 배우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중얼중얼 대사를 외우고 있다. “저 분도 배우예요?” 질문도 자연스레 나온다.

1시간가량 산책이 끝나면 이제 본 공연을 관람할 시간이다. 하지만 ‘유령산책’에 참여한 관객들은 일반 관객과는 다른 통로로 극장에 들어선다. 그것도 배우와 함께다. “지금 보는 것처럼 이미 연극은 시작했고 여러분은 무대 위에 있습니다. 이 순간 연극 속의 등장인물이 된 거죠.” 무대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그룹의 관객이 무대중앙에서 배우가 연기하는 연극 ‘햄릿’의 한 장면을 감상하고 있다. “이제 관객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안내자를 따라 관객들이 착석하고 나면 본격적인 연극이 시작된다.

연극 ‘남산 도큐멘타’ 프로그램 중 ‘유령산책’의 한 장면. 배우 성수연이 ‘최종길 고문 치사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바닥에 누워 연기하고 있다(사진=남산도큐멘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드라마일까. 연극이 관습적인 형식을 탈피했다. 배우가 일방적으로 대사를 쏟아내던 방식과 다르게 새로운 형태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평론가 김소연은 “허구의 드라마가 아닌 존재하는 현실을 어떻게 무대로 끌어올 건가에 대한 문제”라며 “우리의 삶에 대한 얘기는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때로는 배우가 없는 파격적인 형식으로 스토리를 풀어내기도 한다. 지난 13일부터 15일까지 서울 문래동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에서 공연된 연극 ‘투표는 진행 중입니다’가 대표적. 스크린과 관객, 이를 연결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작품은 관객들이 투표를 진행하며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을 직접 체험하도록 했다. 관객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자 체험자가 되는 것이다.

내달 26일과 27일 양일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릴 연극 ‘100% 광주’ 역시 마찬가지. 실제 100명의 광주 시민들이 주인공으로 참여해 각자의 사연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리얼리티를 강조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 ‘나와 연결돼 있고 광주를 설명할 수 있는 냄새’ 등 소소하지만 친숙한 얘기를 관객 앞에서 풀어낸다. 조만수 충북대 교수는 “이런 형식은 단순히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연극이 무엇인가’에 대해 반성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며 “새로운 방식에서 오는 신선함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내달 26·27일 양일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르는 리얼리티 연극 ‘100% 광주’의 한 장면(사진=아시아예술극장).


현실을 연극화하는데 꼭 세팅된 무대가 필요한 건 아니다. 낯익은 산책길이나 골목길도 멋진 무대가 될 수 있다.

2010년 공연된 연극 ‘헤테로토피아’는 서울 중구 입정동의 뒷골목을 무대로 삼았다. 같은 해 공연된 ‘당신의 소파를 옮겨드립니다’에서는 광화문 거리가 무대가 됐다. 3인용 긴 소파를 밀고 다니는 여자, 로봇가면을 쓰고 잠자리채를 든 남자 등 곳곳에 심어놓은 장치는 일상의 공간을 연극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때 관객은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이자 연극의 한 요소가 된다. ‘당신의 소파…’를 만든 이경성 연출은 “한 명의 작가가 내보인 관점이 아니라 연극을 보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 이런 형식의 장점”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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