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용담동에서 화장품 가게를 하던 박영란(62, 여)씨는 태풍 나리가 쏟아낸 물폭탄에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하천 범람으로 화장품은 모두 쓸려 갔고 가게도 절반 가량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살 길이 막막한 박 씨에게는 추석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치다.
박 씨는 "영(이렇게) 하지도 못하고 정(저렇게) 하지도 못하고 살 길이 없어 넋만 놓고 있다"며 심경을 말한 뒤 "추석이 대수냐, 어떵(어떻게) 살지도 막막한데 추석은 무슨...."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집이 침수된 김두진(76) 할머니에게도 추석은 먼나라 얘기가 돼버렸다.
김 할머니는 "이 난리통에 추석 준비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하냐"며 "그 날 밥상에 숟가락만 놓고 '이렇게 지냅니다' 해도 잘 했느니 못 했느니 할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특히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복구작업은 심신을 지치게 하고 들어갈 집도 없는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다가오는 추석이 피해 주민에게는 오히려 더 고통스럽다.
제주시 용담1동 김정현(64) 씨는 "음식은커녕 잠잘 곳도 없는 상황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며 "복구가 어느 정도 안정돼야 추석도 제대로 보낼 것 아니냐"고 반문한 뒤 "지금 이 상태에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조상님도 이해하겠지 뭐…"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주에 파견된 군 장병들도 이미 추석은 잊었다. 육군 공병단 소속 임기옥 중위는 이번 추석 때 고향인 경북 상주를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모두 반납했다. 임 중위는 "고향에 못 가지만 더 소중한 일을 하고 있다"며 어머니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임 중위는 "추석때는 못 가지만 좋은 일 하러 제주에 왔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라"는 말로 가족들을 안심 시킨 뒤 "우리 소대원들 건강하게 이끌고 제주도에 큰 도움 준 다음 무사히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