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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의대 박사과정 중이던 안 의원은 국내 유입된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 ‘브레인’을 치료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브레인 치료제인 컴퓨터용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 ‘백신’(vaccine)을 개발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지에 게재됐으며 안 의원은 의사의 삶을 병행하며 이 백신을 7년간 무료로 제공했다.
초기에는 백신 프로그램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지만, 점차 컴퓨터 바이러스의 위협이 커지면서 백신 프로그램이 필수로 자리 잡았다는 설명이다. 안 의원은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백신을 업데이트하며,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연구를 지속했다”고 했다.
그가 처음 사용한 백신이라는 명칭은 오늘날 백신 프로그램이라는 용어로 정착됐다.
안 의원은 “과거 국내에서 백신을 ‘왁진’, 바이러스를 ‘비루스’라고 표현했는데, 제가 백신·바이러스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는 결국 표준어로 자리 잡았다”고 강조했다. 안랩이 제공하는 프로그램도 백신Ⅱ, 백신Ⅲ 등과 같이 뒷부분에 버전 숫자를 붙여오다가 현재는 ‘V3’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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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원은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 창업 계기에 대해선 “당시 저는 의대 동기 중 가장 먼저 서울대 의대 교수가 돼 탄탄대로를 가고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국내에서 컴퓨터 백신을 개발할 사람이 저밖에 없었기에 사회적 책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업이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안 창업자는 “사업 초기 4년 동안은 거의 매일 은행에 돈을 꾸러 다녔다”고 털어놨다. 그는 당시 대기업들이 납품 대금을 현금 대신 6개월짜리 어음으로 지급하는 경우가 많아, 회사 운영에 필요한 현금이 늘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직원들 월급을 지급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은행에서 연 12% 선이자를 떼고 어음을 현금화하는 ‘어음깡’을 했다고 전했다.
이후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는 재벌그룹에 백신 소프트웨어를 납품하며 사업이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여파로 다시 한번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상했다.
이 같은 경제위기 속에서 안랩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소프트웨어 기업은 원자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제조업과 달리 부도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후 10년 만에 코스닥에 상장하며 기업을 안정화시켰고, 전문 경영인 체제로 전환한 뒤 본인은 카이스트 교수로 새로운 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계 은퇴 후에도 안랩 경영이나 고문직으로 복귀할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현재 국민의힘에서 ‘AI 3대강국 도약 특별위원회’(이하 AI 특위) 위원장직을 맡아 AI 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 마련에 집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안 의원은 “AI 특위 위원장으로서 우리나라 AI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법안을 발의하고 있다”며, “AI 연구·개발(R&D) 예산이 중국이나 미국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만큼, 관련 예산 확대와 법 개정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안랩은 국내 보안 산업과 함께 성장하며, 기술 혁신과 지속적인 도전을 통해 국내를 대표하는 사이버 보안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안전해서 더욱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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