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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지난 21일 오전 9시께 한국은행 본관 8층. 장병화 부총재와 서영경 김민호 윤면식 부총재보의 비서들은 출근한지 얼마 안 돼 갑작스런 연락을 받았다. 이주열 총재 쪽이었다. 1시간 후 긴급 회의를 한다는 것이었다. 장민 조사국장, 홍승제 국제국장, 허진호 통화정책국장, 신호순 금융시장국장 등도 호출을 받았다.
오전 10시께. 시작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총재가 갑자기 회의를 주재한 건 취임 이후 처음이었다고 한다. 새해 벽두부터 요동치는 ‘차이나 리스크’를 한은이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함이었다. 이 총재는 “시장과 더욱 원활히 소통해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한은의 상황인식은 가볍지 않다.
그럼에도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게 한은의 딜레마다. 이 총재 등은 중국발(發) 위험에 따른 통화정책도 함께 논의했다. 중국이 무서운 건 오히려 대(對)수출 타격으로 인한 실물경제 위험이 꼽힌다. 한은도 어떻게든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다. 잇단 기준금리 인하에도 경기를 띄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닥쳐오는 더 큰 파고는 통화당국에 불길한 징조다.
한은 사람들은 “당국의 정책 영향력이 점점 작아지고 있음을 느낀다”면서 “이는 전세계 중앙은행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한은의 근본적 고민…“통화정책 영향력 작아진다”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 알게모르게 돈을 쓰게 할 것인가. 저성장 시대, 한은 등 각국 중앙은행은 이 중대한 물음 앞에 길을 잃고 있다. 이리저리 돈을 흩뿌려 놓았지만 정작 사람들은 돈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5일 한은에 따르면 6개월 후 소비지출을 전망하는 소비자심리지수(한은 집계)는 지난해 12월 107로 그해 4월(106)과 비교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를 봐도, 지난해 3분기 가계평균소비성향은 사상 최저인 71.5%를 기록했다.
이는 한은이 기준금리를 네 차례나 낮춘 기간과 겹치는 것이어서 더 주목된다. 돈의 값을 낮춰도 정작 기업은 소비를 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지갑을 열 의사가 없다는 것인데, 차이나 리스크가 실제 불어닥치면 이런 경향은 더 심화할 게 뻔하다. 한은 관계자는 “선진국 중앙은행이 돈을 푸는데도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한은의 ‘진짜 실력’은 불황기 때 드러나게 마련이다. 한은의 주업무는 ‘안정’이다. 통화정책을 통해 경기가 과열되면 식히고, 얼어붙으면 데워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에 온기를 불어넣는 게 찬물을 끼얹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점이다. 한은 고위관계자는 “금리 인상의 충격파가 인하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크다”고 했다. 금리를 올리는 약발은 각계의 반발 속에 곧바로 나타난다는 얘기다. 쉽게 말해 쓰던 돈을 안 쓰게 하기는 어렵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미 사상 최저인 금리를 더 내린다고 해서 각 경제주체의 심리를 움직이긴 어렵다. ‘아, 이 정도면 돈 좀 써도 되겠구나’라고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능력에 있어 한은은 낙제점을 면하기 힘들다.
특히나 금리가 낮아질대로 낮아진 만큼 다음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점에서 고민의 깊이는 더해지고 있다.
◇선진국도 비슷한 난관 봉착…중앙은행 무용론까지
이는 한은만의 난관은 아니다. 유럽과 일본의 중앙은행이 최근 추가 양적완화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선진국들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행한 돈 풀기가 효과를 보이지 못했음에도, 또다시 그 미봉책을 꺼낸 것이다.
다만 역시 성공 가능성은 미지수다. 오히려 현재의 세계경제 불안 자체가 ‘커진 몸집’(양적완화)에 가려진 ‘어두운 민낯’(공급과잉 등) 탓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그래서 확 풀린 통화에 연명하는 ‘불순물’을 조정해야 한다는 구조조정론이 비등하다. 하지만 이 역시 중앙은행이 앞장서기엔 만만치 않다는 한계론도 동시에 나온다.
이 때문에 이번 다보스포럼에서는 중앙은행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다. 인플레이션의 시대처럼 중앙은행은 더이상 시장을 구원할 수 없다는 회의론이 분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