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명예회장이 전국민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은 2000년 첫 기부를 시작한 이후 15년 간 변함없이 나눔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갑의 횡포 대신 상생과 공존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우리 사회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이 건재함을 확인하고 안도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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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지만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300년 이상 만석꾼의 부를 누린 경주 최부잣집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또 해방 이후에는 교육이 국가 발전의 근간이라는 철학에 따라 전 재산을 들여 영남대학교를 설립했다.
손에 쥔 부를 누리는 데 안주하지 않고 명예(노블레스)에 걸맞는 사회적 의무(오블리주)를 다하는 데 평생을 바친 것이다. 최준 선생이 1970년 별세한 것을 감안하면 한국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를 찾기 어려워 진 것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경주 최부잣집이 12대에 걸쳐 실천한 6가지 가훈(六訓)을 살펴보면 지도층이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이 들어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마라’는 철저한 정경 분리를, ‘만석 이상의 재산은 모으지 마라’는 자기 절제와 상생을 의미한다.
또 ‘흉년기에 재산을 늘리지 마라’는 공정 경쟁을,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소통 강화를 강조한 것이다. ‘사방 100리 내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와 ‘시집 온 며느리는 3년 간 무명옷을 입으라’는 가훈은 각각 복지 확대와 근검 절약의 뜻을 담고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동시대를 살았던 조선 후기의 최고 부호 임상옥과 김만덕은 각각 의주와 제주에서 사업을 일으켜 지리적으로 3000리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빈민 구제에 헌신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국경지대 인삼무역을 독점하면서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던 임상옥은 평생 계영배(戒盈杯)를 곁에 둔 것으로 유명하다. 계영배는 7할 이상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버리는 잔으로, 임상옥이 만년에 구휼에 힘쓸 수 있었던 동기가 됐다.
노비에서 기생을 거쳐 해상무역 사업가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 김만덕은 제주도에 대규모 기근이 들자 전 재산을 털어 쌀을 구입해 주민들을 구제했다. 이같은 공로로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했다.
윤은기 동아대 교수는 “부는 정당하게 일굴 때 더 빛을 발하는 법이며 우리 전통 속에서도 청렴하게 부를 일군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사회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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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자선구호재단(CAF)이 지난해 발표한 세계 기부지수에서 한국은 60위에 그쳤다. 기부에 대한 의식 수준이 낮은 게 낮은 순위에 머물고 있는 이유다.
한국 기업들은 전체 기부액의 80% 이상을 내고 있지만 늘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기업인들이 사재를 출연하는 경우도 비자금 조성이나 경영권 세습과 관련해 의혹을 받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한국 사회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화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깨끗한 부(淸富)’가 박수를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한양행(000100) 창업주인 고(故)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은 모든 기업인들이 곱씹어봐야 할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는 유언장에서 “아들은 대학까지 마쳤으니 자립해서 살아가고 딸에게는 유한중·고등학교 주위의 땅을 줄테니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동산을 만들라”고 한 뒤 “그밖에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복지사업과 교육사업 등 사회를 위해 쓰기를 바란다”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1971년 사망할 때까지 기부한 금액은 현재 가치로 2조2000억원에 달한다.
정문술 전 미래산업(025560) 회장은 사재 515억원을 카이스트(KAIST)에 기부했다. “기부를 결심하고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이 흔들렸지만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돼 기쁘다”는 정 전 회장의 소회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지난 8월 18일에는 이준용 대림산업(000210) 명예회장이 한민족의 숙원이랄 수 있는 통일 실현을 위해 전 재산 2000여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