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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정 서울여대 총장은 여성이 사회에 진출해 경험과 능력을 쌓는 게 배우자를 찾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여성이 환경 변화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면 무엇보다 사회적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결혼은 ‘선택’이지만, 직업은 ‘필수’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유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지요. 적절한 배우자가 나타나고 본인이 판단할 때 적당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 때 결혼을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큰딸이 38살이지만 결혼 문제로 재촉한 적이 없습니다.”
◇ 7년간 육아 집중하면서도 사회 복귀 준비
전 총장은 27살 때 결혼했다. 당시로서는 늦은 결혼이었다. 그에게 ‘사회 생활과 가정의 양립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는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남편의 배려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총장의 남편은 얼마 전 정년 퇴임한 이창대 전 인하대 교수다.
“철학과 교수였던 남편은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저를 단순히 한 사람의 아내가 아닌 사회에 필요한 인간으로 대했어요. 육아 문제로 직장 생활을 몇 년 쉴 때 꾸준히 제가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도 남편입니다.”
1972년 서울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그는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결혼한 이듬해 첫 딸이 태어나자 직장생활을 접고 육아에 전념했다. 전 총장이 존경하는 스승인 고황경 서울여대 초대 총장의 영향이 컸다.
“고황경 선생님께선 서울여대 총장으로 재직하실 당시 여교수가 아이를 낳으면 교수직을 그만두게 했습니다. 나중에 복직을 하더라도 집에서 일단 자녀를 돌보도록 했습니다. 초대 총장께서는 아이가 어릴 땐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야 한다고 믿으셨거든요.”
신혼 초에는 전 총장의 남편이 시간강사로 일할 때여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다고 했다. “시간강사 수입이 뻔하다 보니 남편이 은근히 맞벌이를 요구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 손에서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7년여 동안 집에서 육아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전 총장은 전업주부의 삶을 사는 기간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했다. 사회로 복귀할 생각이었던 만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남편 역시 아내의 사회 복귀를 적극 지지하고, 지원해줬다고 한다.
“애를 낳고 키우면서도 남편에게는 항상 ‘언젠가는 꼭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생활을 다시 하겠다’는 뜻을 밝혔어요. 남편도 전임강사 자리를 얻어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공부할 기회를 열어줬어요. 사실 육아를 하면서도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하라고 독려해 준 사람도 남편입니다. 그(남편)의 배려가 없었다면 중도에 공부를 포기했을지 몰라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그는 1983년 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1990년에는 세계 5대 패션스쿨 중 하나인 ‘뉴욕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로 유학을 다녀왔고, 1992년 서울여대 의류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 “출산은 여성의 몫, 육아는 국가가 책임져야”
전 총장이 가정에서 사회로 복귀했을 때 가장 힘들어했던 이는 큰 딸이다.
“딸이 볼 때 저는 주변 엄마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엄마’였을 거에요. 다른 아이들이 엄마 승용차로 등교하는 것을 보고 제게 태워달라고 하면 저는 ‘네 발로 걸어가라’고 했습니다. 딸 입장에선 학교에 태워다주는 게 관심과 사랑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것이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딸도 나중에는 이런 제 교육 방식을 이해하게 됐지요.”
전 총장은 1970년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개방적 사고 방식을 가진 남편을 만나 사회로 복귀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이 전 총장처럼 운(?)이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전 총장은 여성이 사회에서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선 “사회적 인식 개선과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출산은 여성의 몫이지만 육아는 정부와 사회의 책임’이라는 인식과 시스템이 자리잡으면 자연스레 여성의 사회 진출 또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유교적 사고 방식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주종관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사회 분위기 자체가 여성에게 수동적인 태도를 강요하고 있어 여성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는 구조이지요. 사회적으로 유교적 사고를 불식시키는 동시에 국가가 나서 출산과 육아를 감당해야 하는 여성의 특성을 인정하고, 여성의 삶을 보장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전 총장은 여성 스스로의 자각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여성이 가정도 아니고 사회도 아닌 어정쩡한 삶을 산 결과가 싸이고 쌓여 유리천장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성은 사회의 꽃이란 생각부터 없애야 해요. 자신의 능력을 키워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성장해야 합니다. 여성 스스로 그런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전문성은 기본, 윤리·도덕 갖춰야 진정한 인재
전 총장은 20여년 간 서울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대외협력처장·사무처장·학생처장 등을 지낸 뒤 지난 2월 교수·직원·동문·교계 대표 등 15명으로 꾸려진 총장추천위원회의 추천과 이사회 임명을 받아 지난 3월 서울여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취임 뒤 지금까지 학내 구성원과의 소통을 위해 학과 교수들을 만나고, 직원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앞으로 학교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나름대로 방향을 잡게 됐습니다.”
대학을 어떻게 이끌어갈지는 어떤 인재를 배출할 것인가와 직결되는 문제다. 교육 역량이 바로 그 대학의 경쟁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전 총장은 ‘인성 교육’을 강조했다.
“우리 학교에는 52년의 역사를 가진 ‘바롬 인성교육’이 있어요. ‘바롬’은 초대 총장이신 고황경 선생의 호이기도 합니다. 순수 한글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한다’는 뜻이지요. 사실 최근 대학가에 유행하고 있는 기숙형 학교(RC, Residential College)는 우리 학교가 원조입니다. 인성교육은 공동체 생활에서 타인을 배려하면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생활 습관을 익히는 것으로, 우리 학교 인성교육의 목표이기도 하지요. 대학으로서 전문 인재를 배출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문제는 인성교육을 통해 제대로 된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는 점이지요. 기본적인 윤리·도덕이 말살된 인재는 오히려 사회를 망칠 수 있습니다.”
△전혜정 총장은…
1949년 서울 출생이다. 1972년 서울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서 가정학 석사를, 서울여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세계 5대 패션스쿨 중 하나인 ‘뉴욕 FIT’를 수료한 뒤 1992년부터 서울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교내에서 대외협력처장·사무처장·학생처장 등의 보직을 역임한 뒤 지난 3월 교수·직원·동문 대표 등으로 꾸려진 총장추천위원회의 추천과 이사회 임명을 받아 제7대 총장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