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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 사단이 난 건 다 재건축사업 때문이에요. 어른들이 모이기만 하면 얘기를 해 저도 잘 알아요. 등·하굣길 담장에 붙은 벽보에서도 많이 봤고요. 우리 할머니는 ‘분양신청자 모임’이라는 곳에 다녀오실 때마다 머리를 싸매셔요. 자상하던 어른들 얼굴은 험상궂어졌고, 서로 모른 체 지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답니다.
◇“개발 기대감 컸었는데….”
처음 사업이 시작된 건 제가 다섯 살이었던 2006년이래요. 그때만 해도 낡은 집 허물고 아파트를 짓는 게 붐이였대요. 오죽하면 이노근 노원구청장(현 새누리당 의원) 아저씨가 ‘프리미엄 아파트 심의 기준’을 만들어 이 일대를 명품 아파트촌을 만들겠다고 했겠어요. 집 주변으로 ‘월계역 신도브래뉴’와 ‘동원 베네스트’ 같은 새 아파트들이 들어섰고, 옆동네인 ‘벼루마을’(월계3구역)도 우리랑 같은 시기 사업을 시작했어요. 인근 성북구 장위동은 1년 전 동네가 통째로 3차 뉴타운 지구로 지정됐답니다.
당시 우리 동네에도 주택재건축 조합설립추진위원회가 생겼어요. 아파트 신축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죠. 이때만 해도 분위기가 참 좋았다는 게 어른들 말이에요. 땅이 넓은 데 비해 주민 수가 적어서 아파트를 지으면 사업성이 좋을 거라는 기대가 컸대요. 주민들이 입주할 아파트를 빼고 남은 아파트를 팔아서 공사비를 내면 되니까요. 낡은 집을 주면 공짜로 같은 크기의 새 아파트를 받을 수 있다니 참 솔깃한 얘기죠.
2년 만에 조합이 설립됐고, 다시 1년 만에 시공사를 선정했어요. 마을에 땅을 가진 325명 중 우리 할머니를 포함해 298명이 조합원이 됐대요. 다시 2년 뒤인 2011년에는 구청에서 사업시행인가까지 받았죠. 최고 30층짜리 아파트 7개동을 지어 771가구가 들어설 계획이었다네요. 조합원들이 각자 한 채씩 받아도 새 아파트가 400채 넘게 남으니 훌륭하죠. 그런데 이게 나중에 문제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사업성 악화 우려로 실태조사 신청
그해 가을 조합원 분양신청 때 무려 90명이 현금 청산을 택했지 뭐에요. 아파트를 분양받는 대신 돈으로 돌려받겠다는 거지요. 부동산 경기가 꺾여 주변 집값이 슬금슬금 떨어지고 있었거든요. 내 집을 넘겨주고 같은 면적 아파트를 공짜로 받으려면, 조합원이 아파트를 분양받으면서 조합에 낸 돈 만큼 새 아파트값이 올라야 하잖아요. 90명의 어른들은 그게 어렵다고 봤나 봐요. 분양을 신청한 건 우리 할머니를 비롯한 207명(1명 제명) 뿐이었습니다.
동네 분위기가 크게 어두워졌죠. 지난해 봄에는 현대산업개발이라는 건설회사와 정식 공사 계약을 맺었는데 아파트 공사비가 예전에 말했던 것보다 200억원 넘게 늘어났다고 해 문제가 됐어요. 결국 우리 마을은 그해 여름 서울시 실태조사를 신청하게 됐답니다. 진짜 사업성이 어떤지 어른들은 궁금했던 거죠. 조합측 주장 만큼은 아니었지만 실태조사에서도 우리 동네 사업성이 꽤 높게 나왔대요. 물론 새 아파트가 전부 다 분양될 거라고 가정하긴 했지만요. 정말로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 할머니도 더이상 속상해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지만 어른들 생각은 다른가 봐요. 할머니를 비롯한 몇몇 어른들은 조합이 했던 분양 신청이 무효라고 화를 내요. 선호도 조사인 줄 알았다는 거죠. 조합은 아니라고 주장해요. 이미 분양 신청을 했으니 취소는 어렵고 대신 정 원하면 나중에 최종 계약을 하지 말라는 거죠. 지금 조합은 사업성을 더 높이려고 잘 안 팔리는 대형 아파트를 소형으로 쪼개는 설계 변경을 하고 있대요. 이렇게 되니 새 아파트 숫자는 859채로 더 늘어나게 됐죠. 조합원 몫(상가 분양자 제외 아파트 200가구)이랑 임대아파트(69가구)를 빼면 590가구가 남아요.
◇“사업 계속하자” vs “해산하자”
지금 우리 동네에서는 조합 해산 신청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아요. “사업을 더이상 질질 끄느니 이참에 접자”는 주장과 “사업성 없다는 건 반대파의 거짓말”이라는 반박이 난무하고 있어요. 꽃 피는 3월과 화창한 7월 주민 이주를 시작하겠다는 시공사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분양 신청한 어른들 마음에도 불안감이 커지나봐요. 사업이 계속 늦어지면 이자가 불어나 분담금이 늘어난다고 하거든요. 그렇다고 막상 조합 해산 동의서를 내자니 그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래요. 조합이 건설사에서 빌려쓴 돈이 60여억원에 달하는데 이 돈을 조합원들이 갚아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우리 할머니가 인덕마을로 이사온 건 1988년이었대요. 지금 집이 목도 좋고 120㎡가 넘는 부지도 네모 반듯해 보자마자 계약했다고 해요. 그랬던 집을 처분하고 이제 새 아파트 전용면적 85㎡를 받으려면 7000만원 넘게 더 내야 한대요. 공사기간이 길어지고 아파트 분양까지 잘 안되면 금액이 더 커지는 게 아닌지 할머니는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예요.
얼마 전부터 우리 동네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아저씨 얼굴이 인쇄된 종이가 돌아다녀요. “매몰비용은 조합원 개개인에게 부담시키지 않는다는 게 대법원 판례”라는 말이 적혀 있네요. 시장 아저씨, 정말인가요? 동네 어른들이 무척 궁금해 해요. 그리고, 우리 마을을 예전처럼 화목한 곳으로 돌려놓을 순 없나요. 부탁할게요.
※본 기사는 현장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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