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서울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이 있습니다. 동쪽에 있는 동대문(흥인지문), 서쪽에 있는 서대문(돈의문), 남쪽에 있는 남대문(숭례문), 북쪽에 있는 북문(숙정문)으로 우리는 이것을 ‘한양 사대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4개의 문 중에 현재는 ‘서대문’만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 이야기를 하자면 600여년 전 조선 건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한 지 2년 만인 1396년 ‘한양도성’ 축조를 지시합니다.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궁궐과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였죠. 한양도성 공사는 2차례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공사마다 49일이 걸렸고 1차 12만명, 2차 8만 명이 동원된 대규모 국가사업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체 길이 18.6km에 달하는 웅장한 ‘한양도성’이 완성됐습니다.
‘한양도성’은 평균 높이 4.5~7.5m로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 2개의 수문, 5개의 치성과 2곳의 곡성, 봉수대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 중 4개의 문이 앞서 언급한 ‘한양 사대문’인 것이죠. 국민 모두가 아는 국보 제1호 ‘숭례문’이 바로 남대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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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 중 ‘의’(義)를 넣어 만든 이름으로 ‘의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돈의문은 1915년 일제의 경성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전차 궤도를 복선화한다는 명목으로 철거됐습니다. 1915년 3월 7일 매일신보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토목국 조사과가 진행한 경매 입찰에서 돈의문은 염덕기에게 205원 50전에 낙찰됐습니다. 지금 가치로 추정하면 약 200만원 정도입니다. 그 결과 이 땅에서 ‘의’의 뿌리가 송두리째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조선 ‘의’의 상징인 돈의문을 멸실시킴으로써 항일독립운동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서대문 일대는 풍수지리에 따른 역사적 아픔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풍수설에 따라 ‘숙살지기’(肅殺之氣·가을의 쌀쌀한 기운)가 있다고 해 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됐습니다. 특히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었던 ‘서소문’은 조선의 ‘공식 처형장’이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시대 사법기관인 형조·의금부와 가까웠습니다. 서소문이 자리한 중구 칠패 시장 주위로는 ‘한강의 지천’인 만초천이 흘렀죠. 시장과 천이 만나는 곳엔 백성이 모이니 ‘처형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수월했고, 시신을 내보내는 ‘시구문’ 역할을 하는 문도 자리했기에 처형장으로 최적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많은 독립투사가 처형당한 서대문형무소도 이 주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군부독재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던 많은 운동가가 잡혀갔죠. 독재정권 당시 이 일대에 유난히 많은 군인이 있었던 이유입니다.
현재의 서대문 일대는 수많은 언론사가 밀집해 있는 언론사의 ‘메카’이기도 합니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이 있었을 정도로 서울의 핵심 위치였죠. 이후 국회의사당이 자리했고, 현재도 서울시청·정부종합청사·청와대와 가까운 곳입니다. 관청이 가까우니 기자들이 일하기 편했고 도심이라 자전거나 인력거 이용, 배달 등 모든 편의의 중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서울시는 2009년부터 돈의문 복원 작업을 추진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교통정체 우려와 예산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사업은 중단됐죠. 지난해 서울시는 돈의문 복원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돈의문 일대 공간 재구상 연구용역’에 대한 발주 계획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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