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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일본 내에서 전혀 반성의 목소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사히신문은 지난달 27일 아사히는 ‘기로의 1919…동아시아 100년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100년 전 3·1운동이 발생한 배경을 자세히 소개했다. 다음은 아사히가 전한 100년전 아시아의 모습이다.
100년 전 1919년 동아시아는 역사의 기로에 섰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된 일본은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일등국’으로서 대륙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전국에 펼쳐지고 중국에서는 애국운동에 불이 붙었다. 일본이 그해 겪었던 아시아의 내셔널리즘의 충돌 과정을 거슬러 올라간다.
◇시대의 흐름을 잘 못 읽었던 일본
1919년 1월 18일 유럽을 중심으로 4년간 지속됐던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한 2개월이 지난 무렵, 패전국 독일에 대해 책임을 묻고 전후 질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파리에서 열렸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체결된 이 조약의 이름을 회의가 열린 궁정의 이름을 따 베르사유 조약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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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게 파리 국제평화회의는 세계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첫 기회였다. 그러나 정작 회의에서 일본은 거의 발언을 하지 못했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국제동맹 등 여러 의제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탓이다.
당시 수행원으로 참가했던 고노에 후미마로 일본 총리는 당시 상황을 “일본인의 시야는 협소해 극동 아시아 국가의 일부밖에 보지 못했다”, “평상시 국제정세를 읽는 노력을 게을리한 결과”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결과, 서양 열강들은 엄청난 희생자를 낳았다. 영구적인 평화를 담보하는 조직을 만들고자 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멀리서 서강들의 전쟁을 지켜본 일본은 국제연맹은 이상주의적인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역사가 호소야 치히로는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 그다지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다. 독일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이어받아 전쟁이란 달콤한 과즙이 흐르는 것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이것은 결국 나쁜 영향을 미쳤다”(NHK 다큐멘터리 ‘베르사이유의 일장기’ 중)고 말했다.
여기에 역사적 엇갈림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사회는 민족자결의 원칙이 중요시되면서 전쟁은 위법한 것이란 인식이 커져갔다. 그러나 일본은 이같은 새로운 흐름을 읽지 못했다. 이 엇갈림이 동아시아에 균열을 낳았다.
◇독립선언, 비폭력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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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서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임과 조선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8년 전 일본이 병합된 이래, 조선의 민중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빼앗겨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 민중이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수천명이 거리를 메웠다.
이날 밤 8시, 독립운동에 공명하는 한 명의 청년이 조선에서 일본 도쿄역에 도착했다. 자신이 직접 일본어로 번역한 독립선언문을 품은 채였다.
임규는 조카가 일하고 있는 신주쿠의 과자점, 나카무라를 방문했다. 당주였던 소우마 아이조우의 허락을 받아 별채에 머문 임규는 선언문 약 200통을 인쇄해 이를 우편으로 발송했다.
체포 후 임규에 대해 심문조서에 따르면 임규가 선언문을 보낸 곳은 당시 수상이었던 하라 타카시와 오자키 유키오, 이누카이 쓰요시 등 정치가 90명, 요시노 사쿠조우, 아베 소오 등 학자 약 20명, 주요 신문사, 중앙공론, 태양 등 잡지사, 대학 등이었다.
선언서는 우리가 조선독립을 꿈꾸는 것은 조선인을 위한 것인 동시에 일본이 사악한 길부터 벗어나 동양을 지키는 중책을 완수시키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었다. 조선뿐만 아니라 길을 벗어난 일본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선언서는 또, 아시아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원한과 분노에 쌓인 2000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더러 이로 인해 동양과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굴대인 5억만 지나민족(중국인)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시기를 갈수록 두텁게 해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이 기미독립선언서는 공표되지 않은 채 “위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다”는 조선의 부르짖음이 일본 사회에 울려 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목소리가 모두 쓸모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의 미를 일본에 소개한 사상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렇게 말한다.
“군국주의를 빨리 폐기하자.…우리의 지유를 존중한다면 다른 사람의 자유도 존중하자. 만약 이런 인륜을 무시한다면 세계는 일본의 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망하는 것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 아닌가”(조선과 그 예술 중)
독립운동은 조선 영토에 확대됐다. 민중은 비폭력 정신을 외치며 일본 군경에 맞섰다. 한밤 산 위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경관이 오면 다른 산으로 피신했다. 이 목소리에 대한 일본군경의 탄압은 가차없었다. ‘즉격시간 약 3분…즉사한 사람 51명’이라고 적힌 군의 보고서도 있다.
그 결과 5월까지 약 3개월간 사망자만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에 달한다(박원식 ‘조선독립운동의 혈사(血史)’)
독립운동에서 26년이 지난 1945년 8월, 조선은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의 날을 맞았다. 독립선언서가 일본 독자에 전달된 것은 패전으로부터 3년 후인 1948년 6월이었다.
◇‘근대화의 모델’ 분노의 전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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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분노는 파리강화회담을 향해 있었다. 독일 식민지였던 산둥반도의 이권이 일본으로 승계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항일운동이 전 국토에 번졌다.
중국의 지식이나 학생에게 먼저 근대화에 나섰던 일본은 롤모델이었다. 1912년 탄생된 중화민국 내에서는 일본유학경험자가 요직을 차지해 일본을 따라 근대국가를 형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모습은 그 기대를 무너뜨렸다.
1915년 일본은 21개 조항에 따라 독일의 식민지였던 산동성을 일본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일본을 칭찬하던 목소리는 일본이 “서구열강과 똑같이 오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커지며 빛을 바랬다”(라나 밋타 ‘5·4운동의 잔량’)
항일운동을 주도한 것은 일본의 사정을 잘 아는 유학생들이었다. 이 중에서는 후에 중국 국무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있었다.
일본은 당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였다. 조선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진 3월 1일에는 보통선거법 제정을 요구하는 데모가 도쿄에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여론은 국외에서는 제국주의를 주장하는 등, 아시아의 내셔널리즘에는 무지한 모습을 보였다.
아사히신문 역시 5·4운동에 대해 “가장 큰 원인은 지나인(중국인)이 배외(排外·외국의 문물이나 사상을 배척함) 사상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5월 9일)이라고 분석해, 중국학생의 분노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했다. 이것이 당시 언론의 주류였다.
그 가운데 일본의 대외진출을 경고한 일본인도 있다. 정치학자 요시노 사쿠조는 5·4운동에 대해 “민족의 자발적인 운동을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밝혔고 언론인 이시바시 단잔(후에 일본 제55대 내각총리)은 경제적 합리성 관점에서 식민지를 포기해야 한다며 “소(小)일본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소수였고 쇼와(昭和) 시대 군부가 나서면서 사라졌다.
동아시아의 파열은 결국 전쟁에서의 발전, 1945년 제국일본은 붕괴했다. 역사의 그림자는 지금도 길게 드리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