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승형 사회부장] 시멘트 무더기 틈새로 핏자국이 선명한 여성의 맨발이 나와 있다. 얼굴과 몸은 보이지 않는다. 방글라데시 신문인 데일리스타 4월 25일자에는 ‘익명의 맨발’ 사진이 실렸다. 전날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근교 사바르에서 무너진 의류 공장 건물 잔해 속에서 찍힌 사진이다. 어린 여공들을 비롯한 400여명이 깔려 숨졌고, 다친 사람은 1500명이 넘었다. 사진 속 맨발의 주인은 이 여공들 중 하나였다.
공장 붕괴 사고가 벌어진 이 지역은 의류 공장 4000여 곳이 밀집된,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70년대 청계 피복단지와 같은 곳이다. 공장들은 선진국 유명 의류업체들의 하청업체들이었다. 과거 우리 ‘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카의 여공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유럽과 미국에 보낼 옷을 만들었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해가며 받은 4만원 남짓한 월급을 시골집에 부쳤다.
흔히들 방글라데시를 두고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라고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해 ‘행복은 돈으로 셈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편안하면 행복이다’등을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비극적인 참사 앞에서 감히 ‘행복’을 논하는 건 끔찍하게 비현실적이다. 한 끼 식사값도 안되는 돈을 벌기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 아이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그래도 행복하냐’고 물을 수 있는가.
정작 그 질문은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그 나라의 뻔뻔한 정부 관리들과 천박한 글로벌 자본가들에게 던져야 한다. ‘그렇게 착취해서 번 돈으로 넌 행복하냐’고.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도 ‘행복’이란 단어가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행복해지고 싶단다. 뭐가 어떻게 됐든 어서 행복해지라고 서로에게 권한다. TV광고 카피에서부터 국정 과제에 이르기까지 ‘행복’이 자리잡았다. 바야흐로 ‘행복 과잉시대’다. 행복하기 위해선 정신적 안정이 절대적이라며 ‘힐링’이란 것도 등장해 유행처럼 번졌다. 덩달아 숱한 ‘힐링팔이’ 장사아치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각종 출판물에서 명상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각종 힐링 시장이 탄생했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느끼는 행복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행복에는 공통적으로 따르는 것이 있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이전에 남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것. 남의 불행으로 내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고(故) 이태석 신부처럼 행복은 이타적인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주관적이지만 이타적인 감정, 그것이 행복이다.
어린 아이들을 어둡고 좁은 공장안에 몰아넣고 번 돈으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그 식상하고 지겨운 힐링으로도 행복을 담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방글라데시처럼 세상은 시궁창인데 나 홀로 힐링을 완성했다해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쉬운 예로 이런 공식은 흔하디 흔한 연인들의 이별 통보에서도 존재한다. “너와는 더 이상 행복해질 수가 없어. 다른 행복을 찾아 떠날거야. 그러니 너도 부디 행복하렴.” 무척이나 공리주의적인 이별 방식이다. 하지만 버림받은 사람은 한동안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불행을 안겨놓고 떠나면서 행복하라니 이 무슨 고약한 심보인가.
더 쉬운 예를 들자면 얼마전 퇴임한 우리나라 대통령의 고별사를 들 수 있겠다. 그는 “행복했다”고 ‘감히’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불행한 국민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방글라데시 참사가 터진 이후 그 문제의 선진국 의류업체들, 그러니까 영국 의류판매업체 프리마크와 캐나다의 로블로는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건 떠나는 연인의 이별 통보나 전임 대통령의 퇴임사와도 같은 것이다.
새 정부가 ‘국민의 행복’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에 앞서 모두가 불행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한 일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