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에 태국서 붙잡힌 ''28억 횡령범''

조선일보 기자I 2010.03.06 09:29:29

"''짤리기'' 전에 한탕 하자" 충동적 범행
위장이혼 이후 태국 출국… 잇단 사업 실패·사기 피해
돈 다 날리고 불법체류… "외로움·불안에 시달렸다"

[조선일보 제공] 서울 강서경찰서는 2001년 회사 돈 28억원을 빼돌리고 해외로 달아났던 전 증권업협회(한국금융투자협회에 통합) 직원 이모(45)씨에 대해 5일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이씨는 8년6개월이나 태국에 숨어 살다가 태국 경찰에 붙잡혀 지난 3일 강제 송환됐다.

거액을 횡령하고 도피했다가 허름한 운동복 차림으로 돌아온 이씨는 "도피생활이 괴로웠다"고 했다. 그가 말한 범행 동기를 듣고 경찰관들은 혀를 찼다. 그는 "계속 회사에서 일해도 부장·상무는 될 리 없었고 나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짤리기' 전에 크게 한 탕 하자는 생각으로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다"고 했다.

2001년 이씨는 협회의 회계팀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협회에 들어간 지 14년째였다. 그는 회사 안에서 유일한 고졸 사원이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고졸 입사 동기들은 모두 정리해고됐다. 대학을 나온 유능한 신입사원들이 속속 들어오자 불안감이 커졌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2명의 장래가 걱정돼 매일 술을 마시다가 범행을 결심했다. 2001년 6월 22일 거래 은행 영업부장에게 전화해 협회 소유 국고채를 팔아달라고 했다. 은행은 매각대금 28억여원을 협회 계좌로 입금했다. 이씨는 그 돈을 자기가 관리하던 사내근로복지기금 통장에 넣었다. 그는 통장에 있는 돈을 현금화하는 데 여러 수법을 썼다. 회사와 집 근처 현금인출기에서 한 번에 60만원씩 1600여만원을 인출했지만 많은 돈을 현금화하긴 어렵자 전문 브로커를 동원했다. 회사 명의로 발행한 고액 수표를 은행에서 현금화하는 일을 맡긴 것이다. 떳떳지 않은 돈임을 아는 브로커들에게 17억원을 줘야 했다고 이씨는 진술했다.

이씨는 돈을 현금화한 후 아내에게 범행을 털어놨다. 아내에게 8억여원을 주고 '위장 이혼'을 했다. 이씨는 그해 7월 5일 태국으로 떠났다. 일주일 뒤에야 회사는 횡령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를 경찰에 고발했다.

이씨는 태국 치앙마이에 도착해 현지 한국인과 함께 한국 식당을 차렸다. 하지만 장사는 되지 않았고, 동업자는 달아났다. 식당은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는 파타야로 가서 다시 식당을 열었지만 또 실패했다. 지난해 6월 치앙마이로 돌아온 이씨는 남은 2000만원으로 낚시터를 인수해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그 사이 이씨는 여권이 만료돼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었다. 지난 2006년부터 도장을 위조해 여권에 만들며 감시망을 피해다녔다. 8년 넘는 도피생활은 외로움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가 드러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1년에 1~2번씩 지인과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해 6월에는 자기가 근무할 당시 상사인 회계팀장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이씨는 "나 때문에 강제 퇴직당한 회계팀장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고 했다. 이씨 상사는 자기 아내를 태국으로 보내 이씨의 소재를 확인해 경찰에 신고했고 이씨는 지난 달 태국 경찰에 붙잡혔다.

이씨는 "죄를 짓고 해외에서 사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며 "잘못을 모두 인정한다. 나 때문에 고통받았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이씨는 그러나 아내의 행방에 대해서는 경찰이 계속 추궁을 하는데도 결사코 입을 열지 않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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